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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스포츠 칼럼-최석호 서울신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목포개항장
1897년 10월 1일 고종은 목포를 개항한다. 156호 60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 바다와 갯벌 위에 자주적 개항장 목포가 탄생한다. 11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유달산 북쪽 기슭 목포 원도심 북촌으로 들어온다. 유진 벨 선교사는 아홉 칸 한옥예배당을 짓는다. 양동교회다. 의료선교사 오웬은 프렌치병원을 열고 진료를 시작한다. 교육선교사 스트래퍼는 길거리에 있는 아이들을 데려다 집에서 가르쳤다.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로 발전한다. 조선사람들이 처음 경험한 서구식 근대화의 현장이다. 이렇게 시작한 목포 조선인 마을 북촌이다.

반대편 남촌은 개항장이다. 1900년 일제는 일본영사관(현 목포근대역사관)을 짓는다.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다. 1910년 드디어 강제로 병합한다. 1913년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12개 지역을 부로 선정할 때 목포도 부(府)로 지정한다. 156가구 600명밖에 살지 않는 도시가 세상에 있을까? 이후 목포는 빠르게 성장한다. 1915년 목포 인구 12,782명 중에서 일본인은 5,360명으로 전체 인구 중 42%를 차지했다. 이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개설한다. 유달산 기슭 선창가에 조선내화를 짓는다. 일본인 곡물상 우찌다니 만베이는 상록수로 정원을 가꾼 별서(현 이훈동 가옥과 정원)를 짓는다. 어느새 수탈도시로 변모한 목포개항장 일본인 거주지 남촌이다.

1935년 인구 6만 명을 돌파하면서 전성시대를 맞이한 목포에서 조선인의 애환을 담은 노래가 탄생한다. 1935년 오케레코드와 조선일보가 공모한 제1회 향토노래 현상모집에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이 지은 <목포의 노래>가 당선된다. 이 시에 손목인이 곡을 붙여서 이난영이 부른다. 전 조선인 애창곡 <목포의 눈물>이다. 기쁨도 잠시 일제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라는 가사를 문제 삼아 금지곡으로 지정한다.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은 유달산 맞은편 고하도 통제영을 설치하고 그 해 겨울을 나면서 마지막 해전을 준비한다. 고하도 앞바다에서 우리 수군과 왜의 수군이 대치한다. 명량해전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조선과 왜 두 수군 모두 군량미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지시한다. “유달산에 노적을 쌓고 영산강 상류에 횟가루를 풀어라!”

왜 수군들은 유달산 위에 높이 솟은 군량미 더미를 보고 놀라고, 초저녁 무렵 목포 앞바다를 물들인 쌀뜨물을 보고 기겁한다. 이순신 장군은 싸우지도 않고 왜군을 물리친다. 이때부터 노적봉(露積峯)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일제로서는 잊고 싶은 13척 대 133척 그 치욕이 되살아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조선 사람에게 노적봉은 영광스러운 승리의 상징이다. 목포의 눈물은 조선의 눈물이 된다. 일제는 금지한다.

조선내화 목포공장은 멈췄지만 공장이 힘차게 돌아가던 그때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우찌다니 만베이의 별서는 성옥 이훈동 회장이 효동산으로 가꾸면서 백제 별서정원으로 거듭난다. 성옥기념관에는 추사란, 석파란, 운미란, 소치 목단화, 남농 보덕굴 등 남도남종화 보물로 가득하다. 목포개항장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목포개항장 일대를 허물고 아파트를 지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내화에서는 공장을 서둘러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목포시민은 역사문화지구 지정을 받아낸다. 목포개항장 모든 유산은 목포시민과 함께 고스란히 남았다. 자랑스럽다!

최석호 서울신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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