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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대법원장의 위문
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현역 사병으로 입대했다. 4성 장군이 있는 육군 군사령부 헌병대에서 복무했는데, 마침 그 시기에 부대가 개편되는 큰 행사가 있었다. 육군 본부에서 참모총장이 직접 와서 군 사령관에게 새 부대기를 넘겨주기로 했다.

나는 참모총장이 사열을 받을 때 올라타는 무개차 문을 열어주는 임무를 맡았다. 가만히 서 있다가 몇걸음을 움직여 문을 열고, 탑승한 뒤에 문을 닫아주는 단순한 일인데도 부대 장교들은 몇시간씩 동선을 확인하고 예행연습을 시켰다.

추운 겨울, 사람 하나 없는 휑한 연병장에서 로봇처럼 차문을 열고 닫는 연습을 했다. 해가 진 뒤에는 당일 입을 행사복에 ‘칼줄’을 잡고, 거울처럼 반들거리도록 군화에 광을 내는 일에 시간을 썼다. 부대에선 한 주 내내 환경미화 작업을 했다. 바닥에 가루 비누를 풀고 복도 구석 구석을 닦았다. 물청소를 하면 손이 꽁꽁 얼었다. 바닥을 닦는 데 사용한 비누는 원래 사병들 전투복을 세탁하라고 보급한 물품이었다.

행사 당일, 정작 참모총장은 헌병대 부대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장교들은 ‘총장님 차 문을 열어드리다니, 영광인 줄 알라’는 말도 건넸지만, 직업군인이 아닌 나로선 공감하지 못했다. 그저 높은 분 의전행사가 끝나고 평온한 일상이 돌아오는 게 좋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법원장이 군부대를 찾아 장병을 위문했다는 보도자료를 받았다. 일종의 연례 행사다. 대법원장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군복을 받아 입고, 방문한 부대 지휘관으로부터 현황 보고도 받는다. 몇 년 전 이용훈 대법원장은 탱크에 올라 타 포즈를 취한 사진을 찍어 보낸 적도 있었다. ‘대법원장이 군 장병들을 위문했다’는 관용적인 문구는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다. 사병들이 이용하는 식당에 들러 ‘짬밥’을 먹는 장면도 여전하다. 그날을 위해 취사병들은 얼마나 들볶였을 것이며, 졸지에 3부요인과 사단장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점심을 먹은 사병들은 말과 행동을 조심하느라 밥이나 제대로 넘겼을지 모르겠다.

엄밀히 말하면 대법원장의 군부대 방문은 시찰이지, 위문이 아니다. 장병들이 대법원장 방문을 반가워할 리 없기 때문이다. 육군 참모총장만 와도 부대가 뒤집어지는데, 대법원장이 방문할 때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요즘같은 추위에는 물청소 하기가 고역이다. 정말 사병들이 반기는 모습을 보려면 대법원장이 아니라 유명 연예인을 보내는 게 차라리 나을 듯 하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이기 때문에 일선 부대 시찰을 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드물게라도 야전을 눈으로 볼 필요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고법원 재판장인 대법원장이 굳이 야전 부대를 찾아 군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이유가 뭔지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장군 흉내를 내는 대법원장이라니, 상당히 기괴하지 않은가. 미 연방 대법원장이나 일본 최고재판소 장관도 군복을 입고, 탱크에 올라타는지 모르겠다. 지체 높으신 분들이야 의례적으로 다녀오면 그만이나, 거기 있는 사병들은 며칠을 꼬박 고생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미처 생각치 못한 군부대 방문 필요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장병을 위로했다’고 할 건 아니다. 받는 사람이 고역인 위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대법원장의 군 방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올해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양심은 제한될 수 있는 기본권이 아니고, 국제 인권 규약을 고려했을 때도 ‘총을 들지 않을 양심’은 존중하는 게 옳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 장병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들 총을 잡고 싶었을까. 대법원장이 꼭 군부대를 가고, 그 명분이 ‘위문’이라면, 가서 의전을 받을 게 아니라 차라리 고위 공직자로서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건네는 강연을 하는 편이 났을 듯 하다. ‘우리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판결을 했지만,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비양심적이라는 얘긴 아니다. 여러분이 고생하는 덕분에 법원 판사들도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봉사해줘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인다면 더 위문에 가까울 것이다.

김 대법원장은 1980년 근시를 사유로 ‘병종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아 사실상 군 복무를 면제 받았다.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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