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세계무용축제 개막작 인시에미 이레알리 컴퍼니의 ‘난파선-멸종생물 목록’ ⓒYana Lozena [사진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 |
그렇게 움직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물체가 지나간 자리에 전신을 탈의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무용수가 나타났다. 마치 어떠한 상황을 사진으로 포착해 놓은 듯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어느새 검은 물체가 무용수를 삼키고 지나간다. 한순간에 사라진 무용수는 그렇게 또 다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무용수는 혼자였다가 두 명이 됐다가 세 명 그리고 여섯 명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라진 인간. 환각인가, 환영(幻影)인가, 아니면 어떤 메시지인가. 알 수 없는 존재에서 오는 불안감과 공포감 그리고 초조함은 지속적으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간의 모습은 억압,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연상된다.
서울세계무용축제 개막작 인시에미 이레알리 컴퍼니의 ‘난파선-멸종생물 목록’ ⓒYana Lozena [사진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 |
공연은 내내 검은 물체에 투영시켜 놓은 이미지와 탈의한 인간 본연의 육체를 통해 상징성을 띤 파편만을 전달한다. 그렇게 던져진 파편들을 엮어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보는 이의 상상이 더해지면서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이 작품은 국제사회의 최대 이슈 중 하나인 난민과 이주 문제를 암시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의 거대한 물체와 인간의 존재는 이 시대의 거대자본주의 혹은 사회가 낳은 폭력과 인간의 모습, 이방인에 대한 시선과 두려움, 유럽의 난민과 이주 문제를 은유한 것이다.
이 공연은 제21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2018)의 개막작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서강대메리홀 대극장, 10월 1일~2일)이다. 시댄스(SIDance)는 매 해 세계 각지를 대표하는 저명한 무용단들이 대거 참여하는 가운데 축제의 개막작은 늘 큰 관심을 모아왔다. 이번 개막을 장식한 이 공연은 인시에미 이레알리 컴퍼니의 작품으로, 안무자 피에트로 마룰로는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안무가다. 2018년 유럽의 대표적인 현대무용플랫폼 에어로웨이브즈(Aerowaves-Dance Across Europe)에서 올해의 안무가로 선정됐고,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은 덴마크, 스위스, 미국, 대만 등 올 한 해만 세계 각국으로부터 15여건의 초청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