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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병기 연예톡톡]‘미스터 션샤인’, 김은숙 작가가 그린 고종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헤럴드경제=서병기 선임기자]tvN 토일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친일매국파들의 득세와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병 활동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고종은 일본의 내정 간섭에 저항하면서 독립국가의 면모를 지키려고 노력한 군주로 그려진다. 특히 김은숙 작가는 고종(이승준 분)을 독립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위엄있는 조선의 군주로 그리고 있다. 목소리부터 근엄하고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신중한 느낌이다.

고종은 9회에서 친일파 외부대신 이세훈(최진호)을 처단하는 등 단호함을 보인다. 상하이 덕화(德華)은행에 예치된 비자금(내탕금)을 일제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나온다.

 극중 고종은 열악한 상황임에도 치밀한 작전을 구사하며, 당시 정세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고종은 궁안에 들어와 큰소리를 치는 일본 군인에게 "내 비록 약소국의 군주이나 일군 대좌정도는 이 자리에서 쳐죽여 법도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드라마지만 김은숙 작가가 근대화와 자주화를 추진한 고종에 대해 재평가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하지만 고종은 공(功) 못지 않게 과(過)도 많은 인물이다. ‘미스터션샤인’에서 보여지듯이, 고종이 의병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외척 세력에 휘둘려 실책이 많았고, 그것이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결과를 자초했다.

'골목길 역사산책' 시리즈의 저자인 역사학자 서울신학대 최석호 교수(관광경영학과)는 “고종은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고,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외척에 휘둘려 정치를 망쳤다. 흔히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비극적으로 시해당해 동정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왕비와 왕비 집안의 정치 개입은 고종의 가장 큰 과오로 지적된다”고 말했다.

임오군란(1882년)을 진압하기 위해 명성황후 일파가 청국에 도움을 요청한 게 청나라의 내정간섭과 갑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다. 청의 내정간섭, 위안 스카이가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결국 일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면, 망국의 시작점을 왕의 외척들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은 갑신정변(1884년)때 청의 내정간섭과 명성황후 정권의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급진 개화를 주창한 김옥균 등 급진개화당과 초기에는 뜻을 함께 하는 듯했지만, 민씨 일족들과 김윤식이 이끄는 온건개화파를 등용해 외세 배격의 기회를 놓치게 했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1898년)를 개최하는 등 자주민권운동을 벌인 것도 고종은 진압해버렸다. 만민공동회가 결의한 헌의 6조에는 외국의 하원을 모방한 의회 설치 등 입헌군주제(입헌의회민주주의)를 국체로 만들려는 시도가 보인다. 만약 당시 의회를 구성했다면 7명의 대신(정미7적)이 나라 전체를 그렇게 쉽게 팔아먹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한 만민공동회의 종로광장 민중집회를 고종은 황국협회와 보부상들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켜버렸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가 자신(전제 군주제)을 폐하고, 입헌 공화제를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신 몇 명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데에는 고종의 책임이 크다.

최석호 교수는 “당시 우리가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는 걸 막았어도 이처럼 허무하게 나라가 망하지는 않앗을 것이다. 청이 들어오니 일본이 들어오고, 이 일본군이 조선의 관군과 연합해 동학군 2천여명을 우금치에서 궤멸시켜버렸다”고 했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병합되는 과정을 왕(황제) 한 명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물론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후 미국 공사 헐버트에게 조약 무효를 호소하는 밀서를 보내고, 일본에 의해 외교권마저 박탈당하자 헤이그 특사 파견 계획을 수립하는 등 외교적 채널을 가동하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미국은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조약을 맺은 상태), 후자는 오히려 친일매국파에게 자신의 퇴위 빌미가 됐다.

최 교수는 “연속사격이 가능한 개틀링(Gatling) 기관총을 경복궁에 설치하고, 들어오는 일본군을 향해 쏴야 했었다. 조선은 이미 1887년 삼청동에 기기창을 만들고 각종 총기를 도입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총에 의해 동학농민 등 조선인들이 대거 학살됐다. 고종은 이런 걸 다 설치해놓고 자주국방으로 활용할만한 능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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