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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쉼표] 춤의 역사, 김천흥
한국 전통춤의 선구자 고 김천흥
태초에 몸의 움직임이 있었다. 예술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은 말, 선율, 그림이 아니라 인간의 몸 동작이었다. 그래서 무용수들은 배고프고 힘겨워도 ‘예술의 원조’라는 자부심으로 산다.

김천흥(1909~2007)은 한국 전통춤의 선구자이다. 국보1호 같은 무형문화재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해금, 일무(佾舞,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던 춤), 처용무, 춤공연에 필요한 가면 제작 부문의 보유자였다.

“용안은 화사하면서도 핼쓱했지요. 병약하셨던 터라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셨지만 너그러운 미소를 잃지 않고 공연이 끝난 아악부원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내 주셨답니다.”

순종(1874~1926) 50회 생일 축하연 무대에 선, 열 네 살 소년 춤꾼 김천흥은 당시 공연의 감동을 잊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조선의 마지막 무동(舞童)’이라 불렸다.

궁중악 예술가로 발탁됐지만, 그는 대중음악인 민속악 계승과 연구라는 ‘외도’도 감행했다. ‘위엄’을 버리고, 목수의 아들로서 백성의 음악을 발전시키는데에도 노력했던 것이다.

1922년 14세에 아악부원양성소에 입소한 이후 2007년 99세의 나이로 영면하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김천흥의 삶은 한국 춤의 역사이다.

궁중무용이든 민속악이든 고단한 임금과 힘겨운 국민을 몸짓 하나 하나로 힐링시켜야 하므로, 고도의 예술혼과 품격, 예능감, 메시지 전달력, 인문학적 소양 등을 두루 갖춰야 한다. 그래서 무용 대가의 몸짓은 치밀하고 열정적일 수 밖에 없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오는 9월30일까지 전주의 무형유산원 어울마루 1층 중앙홀에서 ‘작은 전시-음악과 무용의 명인, 김천흥을 기리다’를 연다.

작은 전시 첫회 주인공으로 김천흥을 선정한 것은 그만큼 그가 춤으로 일궈온 전통예술의 가치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우리 춤을 음미하는 것도 남다른 피서 중 하나이겠다.

함영훈 선임기자/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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