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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상 자판기’가 지배하는…이상한 나라 미국
“우리의 시회적 환경 전체와 그 각 부분들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허위와 환상이 만들어지기 쉽게끔 변해버렸다.(…) 본래부터 위험했던 그 경사로들은 지난 수십년을 거치는 동안, 출구도 없이 무한히 이어지며 서로 정신없이 교차하는 거대한 봅슬레이 트랙들의 모습으로 바뀌었다.”(‘판타지랜드’에서)

미국인 30% 이상, 외계인·음모론 집착
가짜가 진짜 압도하는 미국의 현실 해부
비도덕적 트럼프에 진정성…왜?
“더 악화되기전 이성적 회복 필요”역설


“미국은 몽상가와 광신자, 연예기획단장과 관중, 돌팔이 장사꾼과 호구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다.”

‘미국의 이성을 대변하는 날카로운 관찰자’라는 평가를 받는 문화비평가 커트 앤더슨이 저서 ‘판타지랜드’(세종서적)에서 쇼비즈니스로 변해가고 있는 미국 정치와 허위사실에 열광하는 사회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지난 20년동안 이뤄진 수많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의 3분의 1이상이 지구 온난화는 과학자들의 음모로 믿고 있다. 3분의 1은 외계인의 존재를 믿고, 5분의 1 이상은 미디어나 정부가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는 기술을 TV방송 신호에 몰래 심어뒀다고 믿거나 미국 관리들이 9.11 테러에 가담했다고 믿는다. 하버드대 석좌교수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인 존 맥은 외계인이 사람을 납치한다는 사실을 진짜로 믿었고, 이를 규명하기 위해 학회와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과학과 기술이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에 착각과 맹신에 빠져있는 이런 미국을 앤더슨은 ‘판타지랜드’라고 부른다.

미국사회가 어떻게 해서 과학과 객관적인 사실은 무시하고 온갖 억측과 맹신, 유사현실에 빠진 걸까.

저자는 이런 망상과 착각이 미국 역사이전 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필그림 파더스들은 자신만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꿈’에는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만들어내고 믿을 수 있는 자유,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처음부터 달라붙어 있었다는 얘기다.

세일럼의 마녀재판에서부터 사이언톨로지와 1980년대의 사탄공포까지, 헐리우드의 뭐든지 파는 상업주의와 광란의 1960년대, 음모론에서 총기 페티시와 외계인에 대한 집착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500년 시공간을 오르내리며 미국인의 뿌리깊은 판타지 중독을 고발한다.

판타지랜드의 기반은 마틴 루터킹에서 비롯된 복음주의 개신교와 모든 사상의 자유를 내건 계몽주의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마련됐다. 금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보인 초기 이민자에 이어 종교적 유토피아를 찾아 신세계로 온 필그림들이 나라를 세우면서 미국의 판타지 신화는 시작된다. 저자는 특히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광적인 종교적 신비주의의 뿌리와 그 끊임없는 생명력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19세기 과학의 발달은 판타지랜드를 흔들리기는 커녕 더욱 확장시켰다. 진짜에 맞선 가짜 과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대체의학과 골상학, 만병통치약 등이 기적을 바라는 다수와 협잡꾼의 이해관계가 만나 판을 쳤다. 1925년 진화론을 둘러싼 ‘원숭이 재판’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 신앙과 이성의 대립에 그치지 않았다. 이는 홈스쿨링이라는 흥미로운 교육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80년대 불기 시작한 홈스쿨링은 신앙과 맞지 않는 과학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한다는 이유가 컸다. 이는 맹목적 신앙이 어떻게 합리성의 자리를 대신하는지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번영은 미국의 판타지 재능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세계 시장을 장악한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야말로 미국인의 천부적 재능의 산물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그럭저럭 공존해온 현실과 환상의 균형이 깨지고 판타지랜드가 완성된 시기를 90년대 이후로 본다. 특히 인터넷의 보급은 판타지랜드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거짓 정보에 대한 대중의 판단력을 흐려놓았으며, 그 결과 가짜뉴스가 판을 치게 된다.

저자가 판타지랜드의 끝판왕으로 꼽은 존재는 도널드 트럼프. “쇼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고 진정성만 꾸며낼 수 있다면 게임은 끝난다”라는 핵심규칙을 트럼프는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즉 가식적으로 진정성을 연출하는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모습에 신물을 느낀 사람들이 트럼프의 거칠고 비도덕적인 실제 모습에서 오히려 진정성을 느낀 것이다.

저자는 미국인들의 음모에 대한 집착에도 주목한다. 이는 미국 정치의 주요 동인으로 해석된다. 건국 뒤 첫 세기 동안 미국인들은 마녀와 인디언들의 악마적 음모에 시달린다고 믿었으며, 1800년대에는 미국을 붕괴시키려는 바티칸의 음모에 관한 편집증적 의심이 만연해 있었다. 이런 음모론은 현대에 미디어가 많아지고 다양화되면서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실정이다.

저자는 “물살의 속도를 늦추고 도랑과 제방은 손질할 수 있을지도, 어쩌면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멈출 순 있을지도 모른다”며 이성의 회복을 촉구한다.

미국의 개인주의가 위대한 유산으로 떠받들어져온 점에 비춰볼 때, 판타지랜드에 대한 해부와 비판은 일견 ‘미국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처럼 읽힌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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