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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스포츠 칼럼-최석호 서울신학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교수]광화문시대
1964년 5월 국립중앙박물관 혜곡 최순우 과장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로 내려간다. 청자로 만든 기와(靑磁瓦)를 찾기 위한 남행이다. 훗날 청자장이 된 이용희 집 마당에서 청자 가마터를 발견한다. 9월에는 청자기와·청자막새 등을 발굴한다. 스승 우현 고유섭은 개성박물관을 만들고 청자기와 파편을 전시했었다. 1936년 오가와 게이이치(小川敬吉)가 쓴 논문에 등장하는 청자기와 파편 삽도와 같은 형태의 문양을 가진 청자기와 파편이라고 전한다(고유섭,《우현 고유섭 전집 2 - 朝鮮美術史 下 各論篇》2007: 411-413). 혜곡이 강진에서 발굴한 청기와는 우현이 개성 만월대에서 채집하여 개성박물관에 전시한 청자기와 파편과 문양과 형태가 일치한다(윤용이,《우리 옛 도자가의 아름다움》2007: 215). 드디어 고려 황궁 양이정을 덮었던 청기와를 온전히 발굴한 것이다.

《高麗史》(고려사)에 단 한 곳에 청자기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고유섭, 2007: 403; 鄭麟趾,《高麗史 第2冊》1451: 330). 정축 11년(의종 11년 1157년) “대궐 동쪽에 이궁 수덕궁(離宮 壽德宮)을 짓고 그 북쪽에는 양이정을 신축하여 청기와를 이었다”(其北養怡亭 蓋以靑瓷). 양이정을 덮었던 청자기와를 찾아낸 것이다. 고려청자는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상징한다. 청자기와는 그 정점에 있다. 의종의 아버지 인종 원년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들어온다. 고려청자에 주목한다. 특히 그 신비스러운 색깔에 눈을 떼지 못한다(徐兢, 《高麗圖經》1123: 386-388). “도기의 푸른 빛을 고려인은 비색이라 한다”(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청자는 비취색, 즉 옥색이다. 청색이 아니라 녹색이라는 말이다. 송나라 태평노인이 쓴 《袖中錦》(수중금)에 이르기를 천하제일 10가지 중 한 가지를 “고려청자 비색”(高麗秘色 皆爲天下第一也)이라 극찬한다(고유섭,《우현 고유섭 전집 5-高麗靑瓷》2010: 26). 1977년 강진군에서 청자재현사업을 시작한다. 1997년 고려청자박물관을 개관한다. 2004년 청기와 정자 양이정을 복원한 계룡정을 완성한다.

지난 6월 20일 걷기여행 동아리 ‘여사가 간다’ 회원과 함께 청와대 관람에 나섰다. 청와대는 청자기와를 일컫는다. 파란기와가 눈에 거슬리다. 청와대는 일제강점기 총독관저에서 그 역사를 시작된다. 동궐에 동물원, 서궐에 미술관, 경복궁에 총독관저! 능멸하기 위한 시설 중 하나다. 미군정기 군정사령관은 이곳을 관사로 사용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라 이름을 바꾸고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한다. 경복궁(景福宮) 북문(神武門) 위에 있는 집(景武臺)이라는 뜻이다. 윤보선 대통령은 왜구와 독재자의 망령이 들끓는 경무대에서 집무하기를 꺼린듯하다. 대신 이름을 청와대라 바꾼다. 문화민족의 자부심을 가득 담은 이름이다. 이름만 있었던 청와대를 실제로 지은 분은 노태우 대통령이다. 그런데 청자기와집을 짓지 않고 파란기와집을 짓는다. 계룡정 청자기와 청와대 파란기와의 차이는 한 눈에 들어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화문시대를 열겠다고 공약했다.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광화문 정부청사로 옮기겠다는 구상이다. 일제가 우리나라 지배자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자리 잡은 곳을 떠나는 것이 옳다. 법궁 경복궁 위에 있기보다는 아래에 있는 것이 맞다. 파란기와집이 아니라 청자기와집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광화문시대를 하루라도 빨리 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문화민족 자부심 더 높여 문화보국 큰 뜻 만방에 펼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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