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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P 서거 ‘3김 시대’ 주역들 모두 역사 속으로
- ‘민주화 기여’ vs ‘지역ㆍ계파정치’ 평가 엇갈려

[헤럴드경제=이태형 기자]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서거하면서 반세기 한국현대정치를 지배했던 ‘3김 시대’의 주역들이 모두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이어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2009년 유명을 달리했다.

JP 계파는 양김과 달리 자택이 있던 행정구역명(청구동)보다는 김종필계 또는 JP계로 불리면서, 상도동계(YS), 동교동계(DJ), 청구동계(JP)로 상징되는 3김의 정치역정은 한국정치사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줬다.

YS, DJ, JP라는 이니셜로 더 알려진 3김은 때로는 같은 편에 서서, 때로는 대척점에 서서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라는 정치현실을 보여주며 애증의 관계를 엮어왔다.

군 출신인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고,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치면서 야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절대 권력자인 박 전 대통령이 1979년 10ㆍ26사태로 세상을 작별하면서 이들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듯했으나, 곧이어 터진 12ㆍ12쿠데타와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으로 3김은 긴 ‘정치적 겨울’을 보내야 했다.

JP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DJ는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YS는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도입된 대통령 직선제는 3김을 한국정치의 전면으로 끌어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해 말 대선에서 DJ와 YS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JP도 충청권을 기반으로 출마하면서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기는 했지만, 이미 한국정치는 이들 3인의 합종연횡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지형으로 바뀌었다.

특히 이듬해인 1988년 4월 치러진 총선에서 YS(통일민주당), DJ(평민당), JP(신민주공화당)는 각각 영남, 호남, 충청의 표를 결집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를 만들었다. 지역주의, 그리고 지체된 민주화 열망, 소선거구제의 ‘독식’ 구조가 가져온 파란이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89년 당시 김대중 평민당(가운데), 김영삼 민주당(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서울 가든호텔에서 회동을 갖고 특위정국 마무리 등 새해 정국운용에 대해 논의하기 앞서 악수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89년 당시 김대중 평민당(가운데), 김영삼 민주당(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서울 가든호텔에서 회동을 갖고 특위정국 마무리 등 새해 정국운용에 대해 논의하기 앞서 악수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

한국정치의 3분할 구도 속에 3김은 각기 지역을 호령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1990년대는 3김 시대의 절정기였다.

YS와 JP는 88년 4월 총선에서 나타난 “야당을 하라”라는 민의를 거스른 채 1990년 집권여당과 합당하는 ‘3당 합당’(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에 참여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었고 1992년 대선에서 YS는 민자당 후보로 출마, 야당후보인 DJ를 누르고 당선됐다.

YS와 JP는 민자당 총재와 대표 최고위원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듯했으나, JP가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한 뒤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다시 결별했다.

1997년 대선에서는 DJ와 JP가 손을 잡았다. DJ는 JP와의 ‘DJP 연합’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JP는 DJ정부 초대 총리로서 정권의 한 축을 맡았으나, 2001년 9월 내각제 개헌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DJP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이후로도 JP는 자민련 총재로서 대권도전의 꿈을 이어갔으나, 2004년 총선에서 참패하자 결국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3김은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정치에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다는 ‘정치 9단’의 칭호는 3김에게만 허락된다. 그만큼 3김이 한국정치에 남긴 발자취와 폐단은 깊고 크고 넓다.

이들이 한국정치의 민주화에 이바지했다는 긍정론과 지역주의 또는 보스ㆍ계파 정치의 폐해를 심화했다는 비판론이 교차한다.

‘영원한 2인자’는 공과에 대한 평가를 뒤로 한 채 세상과 작별함에 따라 3김의 역사무대 퇴장에 최종 마침표를 찍었다.

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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