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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약품 개발·생산, 시간이 생명인데…” 주52시간 근무 어쩌나
제약업계 ‘노동시간 단축’ 우려 목소리
7월 시행 ‘발등의 불’ 가이드라인 못잡아
“유령근무자 속출·생산량 10% 하락할 것”
“ ‘시간=경쟁력’ 연구개발 특성 감안을”


오는 7월부터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주 52시간 근무가 시작된다. ‘주 52시간 근무’는 전 산업계에 피할 수 없는 과제이자 도전이기도 하다.

제약업계도 마찬가지다. 시행이 한달 남짓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뚜렷한 대안을 가진 제약업체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전문직에 해당하는 업계 특수성도 있지만 아직 주52시간 근무를 적용하기엔 업계 시스템이 한참 낙후돼 있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근무체제 가동과 관련해 제약업계는 당황하면서도 정작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워라밸의 실현을 위한 취지는 좋지만, 구체적인 대안없이 진행하는 정부 정책에 제약업계 불만의 목소리는 커져만 가고 있다”고 했다.

주 52시간 근무 도입을 앞둔 제약업계가 시스템마련을 하지 못해 당혹해하고 있다. 연구개발이 많은 제약업계 특성을 고려치 않는 정책이라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서울의 한 기업에서 직원들이 야근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발등의 불’된 주 52시간=23일 업계에 따르면, 개정된 근로기준법 상 오는 7월부터 300인 이상 기업은 직원들이 주 52시간 이상의 근무를 할 수 없다. 50~299인 기업은 2020년부터, 5~49인 기업은 2021년 7월부터 적용된다.

만약 주 52시간 초과 근무를 하게 되면 불법이다. 근로자가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면 해당 기업 대표이사는 2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기업으로서는 따를 수 밖에 없는 강요인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제약기업들의 규모가 다양하지만 상위권 제약사들 대부분은 300명 이상의 규모를 가지고 있어 제도 시행까지 겨우 한달 정도가 남은 셈”이라며 “하지만 아직 회사 내부에서 구체적인 근로지침을 받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시행까지 40여일이 남은 상황에서 아직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건 그만큼 기업의 고민이 많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제약업계 특성상 주 52시간 근무는 사실상 쉽지 않은 과제다. 업계는 춘계 또는 추계학술대회 시즌에는 주말이나 야근 근무도 잦다. 주요 고객인 의사들의 학술대회가 대부분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많이 개최되기 때문이다. 또 갑자기 어떤 질병이 유행할 경우 해당 치료제를 가진 제약사는 급히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 변수가 많아 주 52시간 근무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실제 직장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익명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가 최근 주 52시간 근무 적용 가능 여부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답변을 한 셀트리온 직원 75%는 ‘주 52시간 근무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시범운영을 하는 기업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처럼 서류상에만 주 52시간 근무로 기록하고 집에 가서 근무를 하는 유령근무자가 생길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며 “업무량이 줄지 않는 가운데 무조건 정시 퇴근을 하게 되면 오히려 근로시간은 그대로인데 임금만 줄어드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라고 했다.

▶업계 “의약품 생산량 10% 이상 떨어질 것”=특히 주 52시간 근무가 적용될 경우 제약업계는 의약품 생산량이 지금보다 10% 이상 감소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제약 공장은 ‘시간×사람 수’가 곧 생산량에 해당한다. 잘 팔리는 의약품의 경우 야간 작업이 필요할 만큼 공장 가동은 계속돼야 한다. 하지만 생산직원이 주 52시간만 근무를 하게 되면 나머지 시간에 공장을 운영할 인력이 더 필요하다. 추가 인력을 고용하거나 지금의 근무제도에 유연성을 줘야 한다.

추가 인원 고용은 쉽지 않다. 의약품 생산은 숙련된 고도의 전문인력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정부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탄력근무제도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탄력근무제도를 도입해 생산 업무가 몰리는 시기에 주 52시간 근무를 초과하면 다른 기간에 근무 시간을 줄여 평균을 맞춰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의약품 생산은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쉽게 추가 인력을 채우기가 쉽지 않다”며 “탄력근무제도도 시간을 당겨쓰는 것에 그칠 뿐이어서 전체 의약품 생산량은 지금보다 10% 이상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시간이 생명인 신약개발…“하지 말라는 건가”=제약업계 뿐만 아니라 전 산업계에서 이와 같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자 정부는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지난 17일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는 ‘노동시간 단축 현장 안착 지원 대책’으로 7월부터 기업이 노동자를 신규 채용할 때 지원금을 기존 40만원에서 60만원으로 인상하기로 했다. 300인 미만 사업장이 의무 시행일인 2020년보다 6개월 이상 앞당겨 시작하면 1인당 지원금이 월 80만원에서 100원으로 증가한다. 지원 기간도 최대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기로 했다.

하지만 업계는 여전히 정부의 노동 시간 단축이 불러올 변화를 우려하고 있다.

우선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선 공장 등에 대한 자동화 시스템 도입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줄이고 무인자판기(키오스크)를 도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되면 정부의 의도와 반대로 오히려 일자리가 축소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법이 시행되면 어쩔 수 없이 자동화로 바꾸는 기업이 많아질 것”이라며 “신규 채용 인원이 줄면 정부가 의도한 일자리 창출 의도가 오히려 반대로 가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신약개발을 위한 동기부여도 낮아질 수 있어 문제점으로 꼽힌다. 신약개발은 오랜 시간의 시도와 경험이 중요하다. 연구자들에게 한 주에 일정 정도의 시간으로 근무 시간을 제한하면 연구개발에 대한 의지가 불타 오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취지는 좋지만 스타트업처럼 집중적으로 작업에 몰두해야 하는 연구개발 분야는 시간이 곧 경쟁력”이라며 “신약개발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손인규 기자/iks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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