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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단장(斷腸)
지난 30일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리는 법정을 찾았다. 원한관계나 재산상 이익을 노린 것도 아니고, 그저 흥미삼아 어린 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다.

자리가 몇 안되는 작은 법정은 취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판검사석과 변호인 자리는 비어 있었고, 피고인석에는 열여덟살 김모 양과 스무살 박모 씨가 앉아 있었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울 범행을 태연하게 저지른 당사자들이었다. 하지만 외모는 평범했다. 지나가다 마주쳤어도 전혀 인상에 남지 않겠다 싶을 정도였다.

재판장이 판시사항을 낭독한다. “김 양의 진술이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하기 시작하자 방청석에 있던 한 중년 여성이 몸을 떨기 시작한다.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박 씨가 범행을 지시 내지 공모했다고 볼 수 없다”는 대목에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피해자와 피고인, 어느 쪽과 관련있는 사람인지 모른다. 눈물의 원인이 통한인지, 안도인지도 겉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다.

재판장이 주문을 낭독한다. “원심을 파기하고 박 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한다.” 무기징역을 선고한 1심에 비해 크게 감형된 결과였다. 방청석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막상 당사자인 박 씨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방청객 맨 뒷줄에는 한 남성이 선 채로 재판을 지켜보다 연신 눈물을 훔친다. 아까 보이던 방청객과는 달리 분노가 느껴지는 표정이다. 선고가 끝난 후 법정 밖 의자에 앉아 있던 다른 여성에게 다가간다. 아마도 피해자와 관련이 있을 법한 이 여성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종종 두드린다. 걸음을 옮기다 맥이 풀린 듯한 모습도 보였다. 남편인 듯한 남성은 눈물을 닦고 동반자를 부축해서 계단을 내려간다.

평생을 갇혀 있을 뻔한 박 씨는 이번 판결이 확정될 경우 구속기간을 뺀 12년 정도 뒤면 출소한다. 지금 나이가 스물이니 나오더라도 30대 초반이다. 살인죄 방조범에게 결코 적지 않은 중형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눈물짓던 이들이 피해자의 부모였다면 법리와 무관하게 통탄할 결과였다. 어수선한 법정을 뒤로 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려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여성의 울음섞인 말소리가 들린다. “어떡해…어떡해…이제 어떡해야 해….” 그제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차마 거기다 대고 ‘피해자와 어떤 관계시냐’, ‘선고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부모가 자식을 잃은 심정을 ‘단장(斷腸)’이라 표현한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라는 뜻이다. 선고 과정에서는 박 씨와 김 양이 어떤 경위로 범행을 저질렀는지, 이후에는 어떻게 처신했는지 언급됐다. 세부적인 묘사가 나올 때마다 방청객 중 일부는 인상을 찌푸렸고, 더러는 한숨을 쉬기도 했다. 방청객들도, 취재진들도 마음 편히 그 공간에 있던 사람은 없었을 듯 했다. 관찰자에 불과한 이도 화를 내고, 괴로워 하며 선고 내용을 들었다. 범행 당시 박 씨와 김 양은 무작위로 피해자를 골랐고, 일종의 의식이나 놀이에 임하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나눴다. 피해자의 부모가 공판에 매번 나왔다면 그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재판이 끝난 뒤 관련 기사를 검색하니 다분히 흥미 위주로 사건을 소비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보인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내용을 묘사한 기사도 많았고, ‘네티즌들은 이러이러한 반응을 보였다’는 식의 클릭을 유도하는 ‘제목 낚시’는 이 사안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어차피 남 일이라 여기고 누군가는 쓰고 또 누군가는 읽으며 소비되고 있었다. 선고 도중 뛰쳐나온 이들을 끝까지 쫓아가 질문을 던졌다면, 나도 똑같이 이 사안을 가볍게 소비하고 말았을까.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은 양형 이유를 설명하며 “피해자 가족들은 다시는 피해자를 만나지 못하는 극심한 고통을 마주하며 살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1심과 같이 20년형을 선고받은 김 양 뿐만 아니라 감형을 받은 박 씨에게도 똑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언급했다.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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