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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출판계약서요? 누가 그런걸 써요”
지난해 봄, 한 젊은 여성 시인이 시집 출간을 앞두고 문학전문 유명 출판사와 특이한 계약을 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문단내 성폭력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뤄진 당사자간 계약서에는 ‘갑(작가), 을(출판사) 사이에 성폭력, 성희롱 등의 사실이 인지될 경우 서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보도를 통해 알려진 이 사실에 주위 사람들은 ‘세상이 변했구나’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거나 ‘뭐든 명확하게 해놓는 게 좋지’라며, 한마디씩 했다.

이 일은 동료 시인들 사이에서도 안주거리가 됐다. 둘, 셋 모여 얘기를 하다보면 화제는 자연스레 그리로 흘렀는데, 화제의 방향은 좀 달랐다. 시인들은 작가가 ‘갑’이라는 사실이 이상했고, ‘계약서를 썼다’는 데 놀랐다.

그들은 그 출판사와 시집을 내기로 하면서 계약서를 써 본 적이 없었다. 계약은 대개 구두로 이뤄졌다. 출판사가 어느 날, “시집 한 권 내죠” 하면, 그게 다였다. 그런 말은 전화를 통하거나, 술자리에서 뜬금없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면 감지덕지하고 2,3년 꼬박 그 말만 믿고, 의지하고, 희망을 품으며 한 줄 한 줄 시혼을 불태웠다.

그렇게 시간을 견뎌 시집이 출간되면 그때야 계약서란 걸 받아보게 된다. 그 날은 여러모로 ‘경사스런’ 날이다. 시집을 받아보는 날이자, ‘문단 어른들’에게 바치는 200여권의 시집에 사인을 하는 고되지만 뿌듯한 날이며 마침내 계약서를 쓰는 날이다.

기자와 만난 한 시인은 “2012년 2월 ‘구두로’ 시집을 내자는 연락을 받았고 2014년 5월, 시집을 낸 후에야 계약서를 썼다”고 말했다. 다른 시인은 “나이드신 분 외에는 다 그렇게 했다”고 했고, 또 다른 시인 역시 “누가 계약서 쓰고 하나, 그런 상황이 당연시됐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우리 시단에서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40대 시인들이다. 그리고 불과 1년 전 얘기다.

당시 시인들은 ‘갑’과 ‘을’에 대해서도 한바탕 얘기 꽃을 피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갑’이란 사실이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그들은 출판사에 ‘갑’인 적이 없었다. 좀 못마땅하고 힘들어도 출판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했다.

이 ‘권위있는’ 출판사의 ‘시인선’에 들어간다는 건, 그냥 시집 한 권이 나오는 게 아니다. 자신의 보잘 것 없던 이력에 내세울 만한 게 비로소 생기는 일이다.

문예지 원고청탁이란 게 들어오기 시작하고, 심사위원이 되고, 일 자리의 문이 확 넓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이 이력으로 누구는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기도 했다. 적어도 ‘문단 권력’의 가장자리에라도 끼인다는 말이다.

한 시인은 “이는 출판사의 갑질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시인을 길들이는 거다. 구두계약은 치명적이다. 나중에 시집 출간을 없던 걸로 하자고 해도 아무소리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못지않은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일이 문단 내 횡행한 사실은 부끄럽다.

문체부는 약자인 문화예술인들의 인권과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표준계약서를 의무화하고 지키지 않는 곳에 대한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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