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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백년 이어온 韓日우정…‘착한도시’히로시마의 속살을 보다
1700년경 조선통신사 일행 성대히 대접
이방언 “일본 동쪽 최고의 명승지”찬사
지금도 45일동안 조선통신사 기념행사
조선통신사 기록물 유네스코 유산 등재
센수이섬 절경엔 ‘비움의 미학’詩 눈길
‘물위 사찰’이츠쿠시마 신사는 최고 걸작

히로시마(廣島)는 착하다. 도쿄 등지에선 느끼기 어려운, 청정, 순수, 우정이 있다.

히로시마현 역사책은 “조선통신사 일행이 오면 ‘섬이 가라앉을 정도’로 성대하게 맞았다. 500명의 조선 손님 환대가 끝나면 지방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였다”고 적었다.

‘물위의 사찰’ 미야지마 이츠쿠시마 신사 모습.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츠쿠시마 신사는 세계적 디자인 소재의 표본이 되고 있다.

조선통신사 이방언이 1711년 당도해 “일본 동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승(日東第一形勝:일동제일형승)”이라고 칭송했던 말은 지금도 히로시마현 후쿠야마(福山) 고을 사람들이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자랑하는 명언이다.

‘日東第一形勝’은 히로시마현 도모노우라(の浦) 마을을 지키는 사원 후쿠젠지 타이초로(福禪寺 潮樓)에 남아있다. 바위 위에 돌계단을 쌓아, 마을 높은 곳에 지은 후쿠젠지의 이 글귀 아래, 세토나이(瀨戶內) 바다와 섬 풍경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다.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는 히로시마의 값진 유산이다.

신선이 취할 정도로 아름다워 5명의 일왕이 단골로 찾았던 센수이섬(仙島)과 도모노우라 선착장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은 조선통신사가 타고 온 배, 사견선(使遣船)을 모방해 만들었다. 어떤 뭉클함이 전해진다. 센수이섬 고고가라(여기서 부터) 여관에는 이런 시(詩)가 있다. ‘꽃은 무심(無心)으로 나비를 부르고, 나비는 무심으로 꽃을 찾노니, 꽃이 필 때 마다 나비가 올 것이고, 나비가 올 때 마다 꽃이 필 것이라. 우리는 또 남들을 알아가고, 남들은 또 우리를 알아가네.’ 그냥 있는대로 하면 된다는 것인데, 히로시마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신쇼지 한국풍 전각들.

오는 11월19일까지 45일간의 일정으로 히로시마현 곳곳에서 조선통신사 기념 특별행사가 열리고 있다. 현청은 지난 3일 한일 우정의 상징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선통신사 전승보전회의’를 열었다. 조선통신사가 도착하자마자 대접했다는 도모노우라 마을 보명주(保命酒) 시음 기회는 언제든 와도 얻는다.

이렇듯, 히로시마엔 조선이 남아 있다. 히로시마의 대표적인 정원 사찰인 신쇼지(神勝寺)의 전각은 누가 봐도 한옥을 빼닮았다. 신쇼지에서 꼭 해봐야 할 우동 수행 체험은 음식을 비우고 그릇을 청결히 하는 한국 사찰의 발우공양과 흡사하다. 후쿠야마성의 주변 몇몇 전각도 한옥 같다. 효(孝)의 상징인 오노미치(尾道)시 고산지(耕三寺) 역시 마찬가지이다.

히로시마는 쿄토와 도쿄에서 벌어졌던 비정한 권력다툼에 염증을 느낀 착한 리더들이 많이 이주했던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생태와 문화유산을 훼손하거나 뜯어 고치지 않는 자연철학 신봉자들이다.

센수이섬 주변풍경.

히로시마현 센코지 전망대에 오르면, 서쪽은 목포, 남쪽은 부산남항과 통영, 동쪽은 여수를 닮아 한국의 네 도시를 한 번에 보는 것 같다. 석양이 일품이다.

한국과 닮은 듯 다른 히로시마의 생활 터전과 자연 풍경, 한국을 편견 없이 대하는 이곳 사람들의 태도에서 ‘진심 어린 우정’이 느껴진다.

착한 히로시마의 그 속살을 보자. 히로시마 공항에서 내리자 마자 정원을 만난다. 산케이엔(三景園)은 이 지역 산-마을-바다 중 가장 예쁜 곳을 6㏊ 부지위에 미니어처로 만들어놨다. ‘물의 도시’라서 연못이 드넓고, 원두막 닮은 정자, 호변길, 실개천, 초원언덕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표고가 높아질수록 진짜 숲과 계곡 닮은 풍경이 펼쳐지더니 인공미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자연미와 인간의 아름다운 손길이 하나가 된 것이다. 통통하게 살진 비단잉어에게 밥을 던져주는 네살바기 손녀의 야무진 표정에, 벤치에 앉은 할아버지가 흐뭇해 하는 모습도 정원과 잘 어울린다.

슈케이엔 히로시마 명과 단풍빵.

중국 항저우의 서호 처럼 꾸민 정원 슈케이엔(縮景園)은 시내 중심부에 있다. 1620년 히로시마 성주 아사노가의 별장이 있던 곳인데, 중앙의 실권자인 이에야스 가문이 지방 토호 견제를 위해 성(城) 등 지방권력 기반을 축소토록 압박하자, 안온하고 친자연적인 삶을 위해 자신의 다도(茶道) 스승에게 정원을 만들도록 했다. 중앙의 큰 연못 주변엔 정자를, 가운데엔 작은섬 10개를 배치하고 몇 개의 섬을 반달 모양 미니 연륙교로 연결했다. 그리고 다리와 각종 수목이 울창한 오솔길을 둥글게 이었다.

슈케이엔 중앙의 전각 세이후우간(淸風館)에서 말차, 단풍빵 등을 나눠먹으며 조신하게 다도체험을 마칠 무렵, 싱거운 한국 아재의 “Ms. Kimono, Please Smile~!”이라는 가벼운 농담에, 30대 다도쌤은 10년은 족히 참았을 웃음 폭탄을 터뜨린다. “기모노 입고, 라틴 처녀처럼 웃는다”고 했더니 웃음을 참지 못한다. 이제 보니, 정숙한 몸 가짐 아니라, 호탕한 웃음도 ‘자연생태 미니 월드’ 슈케이엔은 너그럽게 받았다. 다도 동아리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이 정원의 청소와 관리를 맡는다. 이 모습 역시 참 아름답다.

슈케이엔에서 만난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 이효재 선생(59)은 “일본의 정원은 자연과의 조화가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일깨운다”고 말했다.

산케이엔 단풍.

‘물위의 사찰’ 이츠쿠시마(嚴島) 신사는 일본 3경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사찰의 관문격인 주황색 오오도리이(大鳥居)는 세계적인 디자인 소재가 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발을 땅속에 묻지 않고 땅 위에 얹어 놓기만 했는데, 물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버티고 서 있다.

이츠쿠시마는 일찍이 일본 토착신앙 신도(神道)의 성지였다. 뒷산 공지선의 S라인은 미모의 보살이 누워있는 모습이다. 신사의 배후 전각과 탑으로는 다보탑(다호토) 등이 있는데, 한국에서 전래된 불교 문화가 반영됐다. 신도와 불교의 공존 지대이다. 바다 위에 ‘두둥’ 떠 있던 신사를 바라보기만 하던 여행자들은 인근 미센전망대(535m), 전통 공예품과 먹거리를 파는 오모테산도 상점가에서 놀다 물이 빠지자 오오도리이로 모여든다. 미남 배우 정호빈을 닮은 남자 가이드 아라타니 슈이치씨는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붓펜으로 그린 이츠쿠시마 그림을 한국 여행자들에게 나눠줬다.

구라시키 타마시마 항.

해질녘 현립미술관에선 ‘카쿠라(神樂)’ 전통공연이 펼쳐졌다. 천상의 용감한 사내가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고을로 내려와 지상의 여인과 혼인한 뒤 마을에 재앙을 입히는 머리 8개 달린 뱀 무리를 처단하고 평화와 풍요, 행복 시대를 여는 스토리는 우리의 환인 이야기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관객과의 대화가 보기 좋았다. 여러 나라 관객의 소소한 질문까지 대답해주더니 “러블리 오디언스 덕분에 힘을 내서 우리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후쿠야마 동쪽 오카야마(岡山)현 구라시키(倉敷) 거리는 옛 정취가 느껴지도록 리모델링한 곳이다. 세계적인 오하라미술관이 있다. 1974년 방직공장을 도시재생으로 새로이 단장한 아이비 스퀘어(Ivy Square)엔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수련’ 작품을 빼닮은 연못도 있다. 히로시마현 아트 투어에 나서더라도 이웃 현의 구라시키는 넣는게 좋다.

신쇼지엔 몇 달 전 시골 초등학교 건물 만한, 사각 비행접시 모양의 ‘고우테이(洸庭)’가 들어섰다. 일본풍의 정원, 한국풍의 전각 너머로 현대적 감각의 예술공간이 더해진 것이다. 안에 들어가면 캄캄하지만 희미한 빛이 하나둘 비추면서 물결이 일고 자동차, 인간군상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평화를 갈구하는 히로시마의 희망 같은 것이었다.

히로시마 성.

히로시마현 관광 슬로건은 ‘아깝다 히로시마’, ‘아쉽다 히로시마’이다. 보여주고 자랑할 것이 너무 많은데, 그냥 있는대로 자족하며 살다보니 이 아름다움을 한국 등 외래 손님들과 함께 나누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고백이 담겨있다.

전남 해남과 위도가 같은 히로시마는 11월에야 단풍이 제철이다. 착한 주민의 붉은 순정이 기다린다. 

함영훈 여행선임기자/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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