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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읽기 - 이은형> 노동시장의 이동성·방향이 문제다
한국의 경제발전 성공
높은 인력 이동성 덕분
하지만 중소기업 인력
빼가는 대기업은 곤란


“1974년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데 짐을 찾으러 갔더니 세관 직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어요. 왜 그런고 하니 책 때문이에요. 책 제목에 ‘노동’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으니까 직원들이 걱정했던 거죠.”

우리나라 인력 및 노사정책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할 만한 김수곤 박사의 회고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을 거쳐 경희대 교수로 봉직하다가 은퇴했다. 우리나라의 압축적 경제성장 못지않게 극적으로 변화한 분야가 바로 노동 부문임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김 박사가 귀국하기 전인 1973년, 잠시 한국을 방문해 근로자를 대상으로 ‘이직 의향’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30% 넘는 응답자가 더 나은 조건을 찾아서 회사를 옮기겠다고 답했다. 미국에서의 조사결과가 30%를 넘었고, 일본의 경우 5%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 근로자도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과 비슷할 것이라 기대했으나 전혀 달랐던 것이다. 조사가 부실하다고 생각해서 그 설문조사 결과를 사용하지 못하고 폐기했다.

KDI 연구위원으로 들어온 후 다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또 높은 수치가 나왔다.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조사했다. 또 30%에 이르는 높은 비중의 응답자가 ‘이직하겠다’고 했다. 일본의 조사결과를 보고 ‘종신고용’이라고 부러워하던 분위기에서 한국 근로자의 높은 이직 의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한국의 빠른 경제발전에 기여한 가장 큰 요인으로 ‘우수한 인력’을 꼽는다. 김 박사는 높은 교육열에 의한 우수 인력이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했다. 즉 아무리 우수한 인력이 있다 한들 시장이 효율적이지 않으면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수 인력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은 바로 ‘이동성’이라고 보았다. 깊은 산골에서도 주저없이 고향을 떠나 공장이 있는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 도로와 이동수단이 발달돼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점, 그리고 좀 더 나은 조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 등이 ‘노동시장’을 효율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산업화가 급속도로 이뤄지던 70년대에 근로자의 ‘높은 이동성’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주 입장에서는 악재였다. 자신의 업체에서 일하면서 숙련된 기술자가 되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경쟁업체로 옮겨가는 근로자를 보면 속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스카우트 방지법’을 만들어 달라는 업계의 진정이 이어지기도 했다. 대우조선이라는 경쟁업체가 새로 진입하는 때에 현대중공업의 정주영 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이 “인력을 열심히 양성하고 있다”고 하기에 김 박사가 물었다. “그렇게 양성해 놓으면 대우조선이 다 뺏어갈 텐데요.” 그랬더니 “내가 안 하면 어떻게 되겠나.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 데려가게 되어 있다”고 했단다. 개별 사업장에서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동성 높은 근로자들이 빠르게 산업 전체를 발전시킨 것이다. 업계에서 앞서가는 기업이 후발주자들의 추격을 도운 셈이다.

최근 중소기업들이 “스카우트 방지법을 만들어 달라”고 정부에 진정했다. 중소기업이 신규인력을 뽑아서 열심히 양성하면 대기업이 뽑아간다는 것이다. 요즘 업계에선 앞서가는 기업이 중소업체나 후발주자의 인력을 뽑아가는 게 대세인 모양이다. 노동시장의 이동성이나 효율성 측면에서는 할 말이 없지만 아무래도 방향이 거꾸로인 게 마음에 걸린다. “대기업 사장님들, 이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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