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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다 가블러’로 13년 만에 연극무대 컴백, "나는 이혜영이다, 고로 존재한다"
입센의 ‘헤다 가블러’로 13년 만에 연극무대 컴백…배우 이혜영이 말하는 그녀의 삶과 욕망

한때 엄마란 틀에 갇혀…연기에 대한 열정조차 감췄지만

내 모습 찾을때 엄마·아내로 더 당당
이젠 ‘자유로운 영혼’헤다에 끌려 무대로
내면의 소리 귀기울이며 정체성 찾아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고 싶은 한 여자가 있다. 19세기 말 노르웨이 최상류층, 장군의 딸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헤다 가블러’다. 장차 교수가 될 유능한 문화학자 테스만과 결혼까지 했지만 ‘헤다’는 곧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어느 누구보다 욕망이 강한 그녀가 한 남자의 여자가 돼 ‘헤다 테스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물질적 편안함을 얻은 대신 이상과 꿈을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깨달은 헤다는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헨리크 입센 작(作) ‘헤다 가블러’의 내용이다.

잠들었던 ‘헤다’가 다음달 2일, 명동예술극장 무대 위에서 깨어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내면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이름앞에 당당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헤다 가블러’에서 ‘헤다’ 역으로 13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하는 배우 이혜영(50)을 최근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헤다 가블러와 닮은 그녀= “배우 이혜영, 내 모습 찾을 때 엄마로, 아내로 더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떤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냥 ‘헤다 가블러’라는 한 사람의 이름, 그것만으로 강력하게 이끌렸어요. ‘나는 헤다 가블러다. 고로 존재한다’고 얘기하는 이 작품 자체가 저에겐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으니까요.”

‘햄릿1999’ 이후 13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하는 이혜영의 선택은 ‘헤다 가블러’였다. 이 작품은 1891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공연될 때 마다 누가 ‘헤다’를 연기할 것인지가 큰 관심사였다. 그만큼 배우의 색깔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뜻. 연극 무대를 다시 밟을 수 있을지 두려움마저 들었다던 그가 유독 이 강렬한 이름 ‘헤다 가블러’에 매료된 이유는 뭘까.

“‘엄마란, 이래야 한다’는 틀에 갇혀, 아이들 앞에서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연기 열정을 감추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내면의 소리를 모른 체하고 지내는 엄마의 그 ‘가식’을 아이들은 금세 알아채더라고요”(웃음)

아이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 좋은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부모가 스스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혜영은 한 때 우울증을 겪은 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남편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지내면서 자유롭고, 창조적인 발상을 하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었거든요. TV 드라마를 통해 연기를 간간이 했던 것도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는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하고, 당당한 엄마의 모습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산 교육’이 된다고 생각하자 그제서야 무대가 보였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어려서 제가 출연하는 작품을 잘 안보여줬는데, 드라마 ‘꽃보다 남자’ 얘기를 친구한테 듣고와서는 찾아보더니 ‘우리 엄마가 배우’라면서 자랑스러워하고 엄마에 대한 마음을 더 열더라고요”

때문에 연극 무대를 준비하는 요즘이야말로 그 어느 때 보다도 행복하다는 이혜영은 스스로에 대해 “확실히 무대 체질인 것 같다”며 활짝 웃어보였다.

다음달 2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헨리크 입센 작, 연극 ‘ 헤다 가블러’를 통해 연극무대에 복귀하는 배우 이혜영. 그는 “‘ 헤다’ 역을 연기하면서 연극무대에 서지 않았던 지난 13년을 보상받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며 “‘헤다 가블러’ 그 자체에 흠뻑 매료됐다”고 말했다.

▶헤다 가블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내 자신에게 솔직하고 ‘이름 석 자의 가치를 찾는 삶’이 중요해.”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다 얼싸안고 기어이 부셔버리는,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오~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이혜영은 ‘헤다 가블러’ 대본을 처음 봤을 때 떠오른 노래라며 서유석의 ‘아름다운 사람’ 중 한 소절을 즉석에서 흥얼거렸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아름다운 사람’이 바로 ‘헤다’처럼 느껴졌다는 것. 작품 속 ‘헤다’는 내밀하고도 변화무쌍한 감정 변화를 표출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마치 ‘여자 햄릿’ 같다고도 일컬어진다.

“이 작품의 대본을 보면, 인간의 무의식 세계까지 활자로 표현해놨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사와 대사 사이에 숨어있는 행간을 읽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런 부분까지 다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만도 한 달 가까이 걸렸죠. 같은 인간으로서 시ㆍ공을 초월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을 밀도 있게 연기해내고 싶어요”

이혜영은 ‘헤다’를 통해 연극을 하지 않고 지낸 지난 13년을 보상받는 느낌을 받고 있다며 설렘과 흥분도 가감없이 드러냈다.

“저는 할머니의 맨발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봤어요. 그만큼 보수적인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입맛도, 생각도 굉장히 예스러운 편이에요. 그런데 ‘땡볕’이라는 작품에서 어촌 작부 역할을 맡고 나서는 그런 ‘센’ 역할만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처음엔 그걸 ‘남 탓’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 속마음에서 그런 배역의 거칠고 자유로운 면을 즐겼던 거 같아요”

‘헤다’ 역할 역시 마찬가지다. 내면의 욕망을 중시하고, 자신의 꿈과 이상에 골몰하는 ‘헤다’의 모습 역시 ‘배우 이혜영’이 갈구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 때문에 ‘배우 이혜영’은 ‘헤다’ 역을 진정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만희(이혜영의 아버지ㆍ영화감독)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깨달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아요. 2년 전에 프랑스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이만희 회고전’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처음엔 ‘왜 우리 아버지를요?’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이상으로 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남긴 족적이 크다는 걸 회고전 진행을 하면서 느끼게 됐죠”

이혜영은 ‘이만희’라는 이름이 여전히 그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었던 데는 영화감독 이만희로서 끓어오르는 예술혼을 아낌없이 불태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스스로를 돌이켜 볼때, 자신이 연기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나 생각해보면 아직은 갈 길이 먼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자신의 정체성과 이름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들여다본 헤다 가블러,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모습이에요. 우리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황유진기자@hyjsound> /hyjgogo@heraldcorp.com
사진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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