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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정파 이한구
조선시대 3대 현인 이언적의 직계후손

여야 가리지 않는 쓴소리 소신파

38년전 부인의 사랑이 가득 담긴 선물

이제는 낡고 해진 지갑이지만 그에겐…





만산홍엽(滿山紅葉)과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 무르익으면서 온 나라에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기국회와 국정감사 등을 통해 올 한 해 농사를 검증받고 행정부를 검증하는 일로 분주하다. 서울시내 도로변으로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10ㆍ26 보선에서 “제가 제일 잘났다”고 떠드는 후보의 목멘 호소가 울리는 것도 가을걷이의 한 풍경이다.

물상이 사시사철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얼마나 심심할까. 하지만 국민에게 사랑받은 정치인들은 대체로 계절을 잊은 듯, 늘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일하는 인사들인 것 같다. 시끄러운 정치놀음을 뒤로한 채 한결같이 소신과 합리성에 따라 할 말을 하는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인’을 꼽으라면 아마 이한구(한나라당), 최영희(민주당), 조순형(선진당) 의원이 거론될 것 같다. 최영희, 이한구 의원은 최근 경실련이 선정한 국감 우수의원에 뽑혔다. ‘일관성’ ‘소신파’라는 점 외에 성실성, 모범의원 수상 경력, 청렴성, 서민 출신의 자수성가 등 국민이 좋아하는 정치인상의 덕목을 덧붙이면 이한구 의원을 ‘몇 안 되는 믿을맨’의 반열에 올리는 데 주저할 사람은 많지 않다.

‘바른생활 사나이’ ‘쓴소리 정치인’ ‘황소 같은 일벌레’…. 이한구 의원에게 붙여진 별명은 늘 감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는 첫눈에 반했던 부인이 결혼 전에 사랑의 징표로 준 지갑을 38년 동안 간직할 정도로 ‘순정파’다. 이념을 넘어 국민정서를 도닥이고 서민을 보듬는 일에 소신을 굽힐 줄 모르는 것도 어쩌면 이 지독한 순정과 맞닿아 있다. 국회 계단에 앉아 가을을 음미하는 그의 모습이 꽤 ‘분위기’ 있어 보인다.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사랑한다”는 고백도 연습 중

국감 직후 제법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국회에서 이 의원을 만났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총선, 대선으로 이어지는 ‘정치의 계절’에 국민이 진정 바라는 정치인상을 보여주자고 해서, 헤럴드경제 정치부 기자들과 여러 의원을 추리고 추린 끝에 선정된 인물이다.

일관성, 바른 소리, 성실성 등 ‘건조한’ 칭찬을 입고 살았기 때문에 ‘이한구의 감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국민이 많은데, 낡고 해어진 약혼녀가 준 지갑을 38년간 움켜쥐고 살아온 면모에서 그의 순정을 느낄 수 있다.

테두리는 낡아 해어지고, 유신시대 스타일이라 포켓이라고는 주민등록증과 지폐 넣는 곳밖에 없어 신용카드 둘 자리가 마땅찮은 지갑이지만, 1973년 가을 어느 날 소개팅 자리에서 그녀의 밝은 눈빛에 반해 구애한 이후 그의 순정은 38년 낡은 지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근검절약과 청렴의 상징으로도 회자된다. 정책에 대한 소신 역시 출발점은 진득하기만 한 이한구식 사랑이다. 직언 잘하는 이 의원의 유일한 약점은 “사랑한다”고 직언하지 못하는 것일 뿐. 정치하면서 세상공부를 많이 한 이의원은 사랑을 ‘직언’하는 연습도 할 태세다.

▶3대 현인 이언적의 직계… ‘바른말’ 선비정신의 원천

그의 좌우명 ‘선비정신’은 어릴 적부터 어르신들로부터 배운 가르침이자, 생활철학이다. 이 의원은 조선시대 3대 현인으로 불리던 회재 이언적 판서의 직계 후손이다. 조선 중기 훈구세력, 대윤 소윤의 혈투 속에서도 중용을 강조하면서 관직에 얽매이지 않았던 회재의 뜻은 이 의원의 ‘바른말, 쓴소리’ 정치철학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언적이 홍문관 부제학 시절 중종에게 올렸던 10개항의 덕목은 민생 경제의 올바른 방향을 정하고 잘못된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권력자에게 당당히 자기 의견을 말하는 ‘이한구식 정치’로 구현됐던 것이다.

기강불가부정(紀綱不可不正ㆍ기강을 바르게 해야만 한다)의 토대 위에서 민은불가불휼(民隱不可不恤ㆍ민생의 괴로움을 구휼하지 않을 수 없다)를 위해 노력하고, 간쟁불가불납(諫諍不可不納ㆍ간언을 통한 국정의 교정은 반드시 용납돼야 한다)의 ‘용기’ 있는 자세로 정치에 임하는 것이다.

그의 청소년기는 가난했다. 해방둥이인 그가 태어날 때까지만 해도 철도공무원이던 부친과 함께 어렵지 않게 생활했지만, 6ㆍ25 전쟁 직후 손댄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봉산시장에 차린 구멍가게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에 처하자 이 의원은 장학금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서울대 상대에 합격해서도 그는 공부하는 것 외엔 재주가 없었다고 말한다. 백면서생 같은 생활에 변화를 주려고 서클에 가입해 문리대 다니던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한 서클룸에서 생활하기도 했지만,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아 이 의원은 오래지 않아 서클을 나왔다.

1969년 제7회 행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해 재무부에 11년 근무하는 중에는 별 탈이 없었다. 곧은 성격의 이 의원이 제 버릇 남 못 주고 공무원 조직답지 않게 바른말, 직언을 했지만, 당시 남덕우 장관은 합리적이고도 소신 어린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줬다고 한다.

그가 새로 발령받는 곳은 이른바 ‘돈 되는’ 곳이었다. 그가 발령받는 시점은 늘 이권 때문에 ‘사고’가 난 직후였다. 증권보험국, 외화자금과 등 ‘물 좋았던’ 부서는 그러나, 그가 부임하고 나면 더는 꽃보직이 아니었다고 당시 동료들은 전한다. 그는 얇은 공무원 월급봉투를 쪼개 불우이웃을 도울 정도로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이한구 의원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할때 늘 보좌진과 원탁에 둘러앉아 ‘브레인스토밍’ 식 소통을 한다<왼쪽>. “절대 버릴수 없죠” 이 의원이 사랑의 징표로 부인이 38년전 선물한 지갑을 내보이면서 수줍은 미소를 띄고 있다.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6·25직후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자 

장학금받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다.

난 공부외엔 재주가 없었기에…

재무부시절 선배 권유로 나간 소개팅…

무뚝뚝한 한마디에도 웃어주는 그녀의 미소가 지금도 날 지탱하는 힘.

직언 잘하는 올곧은 성격이지만…

나의 유일한 약점은 “사랑한다” 직언을 못하는 것.

이회창씨 감사원장 시절 ‘원포인트’ 경제 강의 계기로 정치입문…

정치인의 매력요? 글쎄요~






▶서클 친구 손학규와 결별, 고단했던 유학생활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그는 날벼락을 맞는다. 인사질서를 어지럽혔다는 황당한 이유로 사퇴 압박을 받았던 것. 신군부는 “이한구 과장의 출세가 빨랐다”는 구실을 붙였다. 때마침 승진 케이스였던 이 의원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신군부라면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당시 신군부는 구태 정치인들을 몰아낸다는 이유로 YS, DJ, JP계 정치인들을 대거 축출했고, 심지어 그들의 ‘방계’에까지 광범위하게 손을 대 JP계 사람인 김용환 차관, 그리고 김 차관의 아랫동서인 이 의원까지 옷을 벗겼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사퇴 대상자에게는 출국 제한 조치까지 내려진다는 얘기가 들릴 무렵,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기고 전격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준비 없는 유학은 불을 보듯 뻔한 고생길이었다. 본국에서의 몇 푼 안 되는 생활비를 송금받는 일도 제한될 수밖에 없는 정치 환경이었기에 그는 다시 장학생이 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이한구다운 일이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장학금과 생활지원금이 가장 중요한 대학 선택의 요건. 장학금만 주는 최고 명문대는 서류상 합격권에 들고도 제쳐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무료 학비에 연구조교 조건을 준 ‘신아이비리그’ 보스턴대에 입학했고, 최종 박사 학위는 학비 무료와 넉넉한 생활지원금을 제공한 캔자스주립대에서 땄다.

김우중 회장과 인연을 맺은 것도 미국 유학 시절이었다. ‘바른 소리 잘하는 중간간부’로 업계에 소문이 나서 그런지 김 회장 측에서 미국 생활의 근황을 물어왔고, 장학금을 보내줬다고 한다. 애초 한국외국어대 교수로 가려던 이 의원이 대우그룹 회장실 상무로 선회한 것은 이 같은 인연 때문이었다.

그가 숱한 유혹을 뿌리치고 대우 몰락 직전까지 비교적 장수했던 것은 구성원의 열정과 김 회장과의 의리 때문이었다. 성실과 노력에서는 최고라고 내심 자부했던 이 의원은 김 회장의 부지런함에 놀랐고, 그런 김 회장이 문민정부 청와대가 “정부를 비판하기만 하는 이한구를 자르라”고 했을 때 이 의원을 의연하게 지켜준 데 감동했다고 회고했다.

▶윤여준ㆍ김문수의 ‘공천 학살’에 카타르시스 느껴

“정치?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대우경제연구소장의 코멘트 하나하나는 늘 시장을 출렁이게 했고,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시장주의자 이한구에게 정치는 훼방꾼일 뿐이었고, 경멸의 대상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 경제위기의 먹구름이 서서히 드리워지면서 정치에 대한 환멸은 신념처럼 굳어진 터였다.

그때 친구인 이회성 씨가 찾아와 “이 소장, 우리 형님이 요즘 하도 뒤숭숭해서 경제 공부를 좀 하고 싶다는데 좀 만나주게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감사원장이던 이회창 씨는 이한구 소장의 ‘원포인트’ 경제 강의를 들은 뒤 무릎을 치면서 빗나간 경제 정책에 대한 감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좋은 안목을 얻었다고 고마워했다.

간간이 있을 수 있는 만남 중 하나였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감사원장에서 총리로 발탁됐다가 신한국당 총재에 오른 이회창 씨에게서 1999년 벽두에 다시 연락이 왔다. “비례 대표로 와서 우리 경제를 좀 바로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연히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번엔 법대 친구인 서상목 의원한테서 줄기차게 권유가 들어왔다. “친구, 자네가 정치를 경멸하는 건 잘 안다네. 그런데 지금은 자네가 경멸하는 정치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려는 상황이라네. 그러기에 자네 같은 사람이 와서 경멸하는 만큼 정치를 혼내고 바로잡아 줬으면 하네. 그것은 자네의 뜻과도 통하는 것 아닌가.”

친구들의 합동작전에 등 떠밀린 정치입문이지만 보람이 있었다. ‘영원한 킹메이커’일 것 같았던 김윤환 전 의원 등 민정계를 몰아낸 기획통 윤여준의 혁명적 ‘공천 학살’은 정치를 경멸하던 이한구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이제 정치의 참뜻이자, 경제라는 용어의 본딧말인 ‘경세제민(經世濟民ㆍ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을 구현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고 이 의원은 회고했다.

기대와 좌절, 보람과 안타까움 등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험난한 초선 길을 마무리할 무렵, 그는 학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최병렬 총재는 자신의 지역구인 강남갑을 내어주겠다며 간곡히 출마를 요청했고,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은 대구를 모두 정리할 테니 나오라고 권했으며, 김만제 선배는 내 자리(대구 수성)를 물려줄 테니 결심해 달라고 거들었다. 과연 김 위원장은 대구 지구당 총책을 전면 물갈이했다.

출마할 생각을 하더라도 ‘헛돈’이라 여기던 선거자금을 마련할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던 중, 때마침 오세훈 의원이 주도한 ‘돈 안 쓰는 선거’법이 통과되면서 지역구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던 시기, 초기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지역구 당선자는 단 5석이었다. 그 속에 이 의원이 포함된 점은 그를 재선으로 몰고 갔다.

▶미소에 반한 목석 청년 이한구의 변신

“싸움질만 하는 것 같지만, 여의도는 일을 많이 합니다. 특히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함께 안고 가려고 노력하고, 더디더라도 결실을 얻게 되면 큰 보람을 느끼지요.”

이 의원은 ‘정치인의 매력’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정치는 매력 없다”는 것이 정치해본 사람들이 정답처럼 내뱉는 평가라서 그가 주저하는 10초간의 시간은 모종의 기대감 때문에 길게 느껴진다. 질문은 ‘정치인의 매력이 뭔가’였는데, 그는 국회의원들이 갖는 ‘실직(失職)의 공포’를 얘기한다.

“국회의원을 마치면 갈 데가 없다. 저마다 잘난 사람이 기를 쓰고 국회에 유입되지만, 나갈 때엔 갈 곳이 없으니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이 같은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국회에 오면 세상에서 태어나서 별의별 욕은 다 먹는다. 사회에서 이름 날리다 국회에 와서 욕을 먹는데, 국회에서 겪은 숱한 고생, 지난(至難)한 의사결정 과정, 이런 경험이 장차 사회에서 다른 직역으로 새 출발할 때 자양분이 돼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말하는 ‘고생 끝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국회 밖 전문가 시절에는 해법에 대해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만이지만, 국회의원의 해법은 만나서 얘기하고 설득하고 내 의견을 수정하고 다시 이해시키는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신만으로 한국 정치에 성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한구의 3선에 걸친 소신을 지켜준 요인은 부인 나임구 씨의 ‘긍정의 힘’이다.

1973년 어느 가을, 밤을 새워도 일이 줄어들지 않는 재무부 사무관 시절 선배의 권유로 소개팅에 나갔다. 눈매가 예쁘고 명랑한 성격의 나 씨를 보는 순간,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그녀와의 꿈같은 결혼생활을 떠올릴 정도로 한눈에 반한다.

“밝은 미소, 귀티나는 인상,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배려가 정말 맘에 들었다”고 회상하며 이한구답지 않은 미소를 짓는다. 무뚝뚝한 한 마디에도 까르르 웃어주는 그녀를 잡아야겠다는 의지는 고시 공부 때의 열정보다 백만 배나 셌다. 짧고 굵은 연애 기간을 거쳐 약혼을 앞두고 나 씨가 건넨 지갑은 ‘당신과 일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의 징표라고 여겼다.

이 의원은 지갑을 꺼내 보였다. 들기만 해도 휘어지고, 모서리 가죽은 모두 벗겨졌다. 속에는 주민등록증과 지폐 꽂을 공간 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요즘처럼 신용카드, 회원카드 꼽아 둘 10층짜리 포켓도 없는 지갑을 만지작거리던 이 의원은 평소 성격답지 않게 야릇한 미소로 기자에게 지갑의 이런저런 면모를 자랑한다. 그러면서도 ‘왜 바꾸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안 잃어버렸으니 갖고 있는 거죠”라고 딴전을 피웠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 기질에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바른말 선량’의 오늘을 사람 편하게 해줄 줄 아는 나 씨의 지갑이 지탱한 것이다. 이 의원은 시대 상황 때문에 경제학도였던 부인이 자신의 가치를 사회에서 발현하지 못한 데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기도 했다.

▶“세대 이기주의는 가장 파렴치… 탈이념이 대세”

요즘 그를 둘러싼 키워드는 행복과 탈이념, ‘세대 이기주의’의 근절이다. 행복과 복지는 국민이 걸어온 과거를 이해하고 그 지역 그 시대에 무엇을 해야 국민이 편해지는지를 생각하면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이념으로 갈라 정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덕적ㆍ정책적 해이가 초래되면 강자는 약자에게 그 폐해를 전가하고 현재 세대는 미래 세대에게 뒤집어씌우는데, 멀쩡히 자라나는 후손에게 황폐한 국토와 재무제표를 넘기는 건 파렴치한 행위라고 이 의원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지금의 복지 만능 주장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 톤이 이렇게 높은 건 처음 본다.

18대 국회가 다시 저물어 간다. 그는 8개월 후면 세 번째 국회 문을 닫을 그는 이미 마음을 비운 듯 자리보다는 노무현, 이명박을 뛰어넘을 새 경세제민의 패러다임을 구상하고 있다. 키워드는 국민 정서 보듬기, 그리고 편 가르기가 없는 균형감각이다. 임금에 간언하다 결국 낙향을 택한 이언적 못지않은 후손이 되기 위해 사심은 버리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직역 속에서 할 일은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한구에겐 ‘결실의 계절’이 따로 없다. 만추가경(晩秋佳景)의 이 찬란한 가을에도….

함영훈 선임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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