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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inter’s letter]Egon Schiele (1890-1918)
<육성연 기자>하나의 마음으로 존경할 분을 만난다는 건 최고의 행운이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존경하여 그의 흔적을 따라가려 했던 에곤 실레. 스승의 달 5월에 그가 감사 편지를 쓴다면, 그 편지는 분명 클림트에게 전달될 것이다. 살아 있는 선을 그린 화가, 에곤 실레의 편지이다. 

To. Gustav Klimt

“선생님, 제 여러 그림과 선생님의 드로잉 한 작품을 바꿀 수 있을까요?“

기억나시나요. 17살의 제가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거장인 클림트 선생님을 찾아가 던진 질문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왜 내 작품과 교환하고 싶은 거지? 자네 드로잉이 훨씬 훌륭한데. “라고 답해주셨죠. 기억 못 하실 수 있지만, 이 한마디의 칭찬이 제 그림에 대한 확신의 뿌리가 되었다고 하면 놀라실까요?

절약이라는 단어를 당최 몰랐던 제가, 헤픈 멋내기용의 씀씀이 탓에 최악의 재정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빈 공방과 후원자분들을 소개해 주셨죠.

사람들은 저를 보고 “클림트 그룹”에 속하는 한 사람으로만 보았지만, 전 스스로를 “은으로 된 클림트”라고 불렀습니다. 제 그림 한 점 한 점에는, 선생님의 주된 모티브였던 성, 질병, 죽음의 정신세계가 선생님과 같은 ‘금빛’을 내주길 바라는 희망이 들어 있으니까요. 선생님의 <다나에>작품과 비슷하게 그린 저의 <다나에>(누구나 선생님의 작품을 더 좋아할 것을 확실히 알면서도 그린 그림)도 그저 순수한 존경심의 표시라 말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우아하고 화려한 선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그림을 배우게 되었지만, 이후에는 저만의 길을 걷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비뚤어지고 비실제적인 선들이 난무한 제 그림을 보고 “이건 에곤 실레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죠. 모든 것이 선생님의 은혜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저를 믿어요. 그렇기에 제 작품이 빈이 배출한 근대 최고 미술작품이라 생각하는데, 그걸 굳이 숨겨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전 애당초 겸손의 미덕과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유명하지도 않았던 저를 열렬히 환호해주며 지원해준 애호가들도 저의 이런 확고한 자신감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전, 여행을 좋아하고, 제 잘난 멋에 사며, 멋내기가 취미인 이기적인 도도한 남자이지만, 그 이면에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누나를 어린 시절 잃어야만 했던 순간에 태어난 깊은 고뇌와 우울한 감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제 그림의 드로잉의 선에 담아냈습니다. 적어도 제 드로잉은 그 누구의 선보다 강한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있네요. 제가 이런 확신을 하게 된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값어치하고, 가장 순수하며, 가장 고귀한 열매가 되리라 스스로 믿었고, 그리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첫 전시회에서 제 작품의 가격에 최고치 가격을 매겼습니다. 제가 요구한 800크로네는 몇 년 후까지 높은 가격을 기록했다고 하네요. 당연히, 알려지지도 않은 제 그림은 단 한 점도 팔리지 못했지만(웃음). 그래도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1917년, 쿤스트샤우 전람회를 통해 선생님의 명작 <키스>를 본 이후부터, 저를 에워 둘러싼 모든 것에서 벗어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잘 다니던 예술학교를 그만둔 것부터 시작해서). 이제 제가 바라보는 모든 현상들은 그날의 흥분으로 새롭게 바뀌었으니까요. 그날 이후부터 선생님을 만나 30살 연상을 넘는 우정이 가능했던 건, 기존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망이라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습니다. 

Seated Woman with Left Leg Drawn Up
왼쪽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는 여자, 1971
제가 추구했던 것은, 한 마디로 ‘예술적 자유로움’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지라도 옳지 못함으로 평가받아서는 안될 성질의 것입니다. 예술가를 세상의 과녁으로 꼼짝 못하게 꽂아버리면, 성 세바스티아노처럼(혹은 전시회 포스터 속 제 모습처럼) ‘세상의 몰이해에 대한 희생양’이 되어버리고 마니까요.   

저는 ‘예술가의 자유로움’을 자화상과 누드를 통해 표현했습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밝힌 견해처럼 ‘진정한 자아는 곧 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뿐 아니라, 내가 어떤 신비스런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기 원했죠.

어쩌면, 저의 (애호가들만이 환호한) 교만은 세상에 홀로 맞서 싸우는 저를 더 사랑하려고 애쓴 노력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후 제가 책임져야 하는 어려운 가계사정과, 현실에서 벗어난 예술가의 자유로움 사이에서, 그리고 누드를 외설적인 빨간 띠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편견과 예술적 표현의 자유로움 사이에서(선생님께서는 제가 입에 담지조차 못하는 부당한 죄명으로 어떻게 감옥에 다녀왔는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자유로운 연애방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 사이에서 전 홀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 인생이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고 했죠. 하지만, 저는 친동생 게르티조차도 모르는 혼자만의 괴로움을 앞으로도 겪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이런 슬픔이야말로 예술가에게 절대적인 창조적 인간을 빚어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제 애인이자 모델이었던 발리와의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작품의 모델들과 숱한 스캔들이 났었던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모델이자 애인이었던 발리에게 큰 책임감은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예술적인 영감을 주는 뮤즈가 항상 필요했고, 이것이 제가 여성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으니까요. 제가 나체화를 많이 그렸다고 해서 망나니 같은 호색가는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의 사랑을 부적절한 애정행각으로만 보았습니다. 발리는 쉴새 없이 떠들어 대는 것만 빼면 고귀한 여인임이 틀림없습니다. 모두가 외면했던 감옥에서 위로의 말을 해주던 그녀였으니까요. 하지만, 전 이웃이었던 에디트와 결혼을 약속합니다. 결혼 전 발리를 만나, 우리의 사랑을 1년에 한 번 다녀오는 여름여행에서만 임시 유지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에디트와 함께 셋이서 말이죠. 결국 발리는 절 떠났습니다. 저는 <죽음과 여자>라는 작품을 그리며 진정 그녀와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죠. 결국, 사랑은 예술가로서 누리는 자유로움의 영역 안에 좀처럼 끼어들기 여럽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선생님, 세계적 유명화가는 결코 생존에 알려지지 않는다는 이상한 법칙에 제가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고흐의 운명처럼 생존에 유명세를 못 치렀으니 말입니다(웃음). 하지만, 전 선생님을 만나 진정한 예술가의 길을 걸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멋진 순간은, 선생님의 작품을 만난 1917년의 전시회이니 말입니다∙∙∙.   

From. Egon Schiele

http://www.camhe.co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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