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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들이 그린 자화상>복사꽃 흐드러진 무릉도원…멍한 눈빛에 억겁의 시간이
서은애
내 그림 속에는 항상 내가 들어가 있다.

화면 위에서 나는 때론 철부지 아이의 모습으로, 때론 풋풋한 청년의 모습으로, 또 때론 지긋한 중년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그 모양새를 달리하며 등장한다. 그리곤 어디선가 한 번쯤 보았음 직한 오래된 옛 그림의 산수풍광(山水風光)을 배경으로 여유롭게 거닐며 노닌다.

그림 속 주인공으로 아예 직접 등장한 나는 지극히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품 속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림 속의 나는 개별적인 존재인 동시에, 보편적인 존재로 충분히 확장 가능하다. 어차피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년배들의 인식과 사고, 그리고 감성은 아주 유사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므로.

그래서 내가 내 얼굴을 빌려 펼쳐놓는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너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셈이다. 

중국 청나라 시대 화보집에서 영감을 얻어 그 속에 스스로를 의뭉스럽게 대입시킨 서은애의 자화상 ‘화중유시(畵中宥詩)’ 27편. 기암괴석과 꽃나무 속에서 요염하게 포즈를 취한 모습이 흥미롭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나는 화폭 위에서 과거와 현재라는 공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과거의 오래된, 고풍스러운 산수풍광을 배경으로 삼아, 현재의 시간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나는 능청스럽게 등장해 얼굴 가득 의뭉스러운 웃음을 날리며 지극히 여유롭고도 안온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작업 속에서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과거와 현재라는 물리적 시공간의 구분을 뛰어넘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한 ‘의식과 감성의 흐름’에 멈춰져 있다.

한 번 생각해보라. 사랑과 미움의 감정, 배움에 대한 열망,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희망,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흔들리는 마음, 대자연의 위용 앞에서 품게 되는 경외감 등등…. 

전통적인 산수화인 듯하나 롤러코스터와 전망대가 보이는 서은애의‘ 유원지 산수’. 21세기적 무릉도원을 표현했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한 인간이 맛보고 경험하게 되는 무수한 의식과 감정들 앞에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상의 물리적이고도 기계적 구분이 과연 유의미한 것인가? 우리는 비록 흘러가는 시간, 변해가는 시대에 따라 외양상 각기 다른 모양새로 살아가지만, 기실 한 인간으로서 그 존재 본연의 본질적 모습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 동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과거의 풍광 속에 현재의 내가 어우러지는 모습이 어색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화폭 위에 내가 그려내는 세계. 실존하지 않는 유쾌한 별천지(別天地). 과거와 현재, 그 경계의 언저리 어딘가에 불변(不變)의 감정을 노래하며 즐기는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있다.

글ㆍ그림=서은애(화가)


▶서은애(41)는 울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동양화과와 대학원을 마치고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수묵화의 전통적 화법으로 이상향을 꿈꾸는 현대인의 욕망을 그리는 서은애의 작품은 예사롭지 않다. 분명 빛바랜 고전작품인 듯한데, 산의 능선엔 롤러코스터가 휘감겨 있고, 대관람차가 돌아간다. 고풍스러운 풍경과 초현대적 풍경이 한데 편집된 그림은 기이하면서 색다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작가는 옛 그림과 옛 시(詩)를 찬찬히 읽은 후 이를 작품에 투영한다. 그림 속 인물은 작가 자신으로, 작가는 고색창연한 옛 그림 속으로 슬쩍 들어가 기암절벽의 산수를 유람하고, 때론 신선이 되기도 한다. 그 속에서 달관의 경지에 이른 듯, 여유롭고 지혜로운 삶을 유유히 연기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 아니냐’고 되물으면서.

이영란 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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