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식
어릴 적 형과 동네 야산을 누비며 놀다가 언제 어두워졌는지도 모르게 어둠이 급속도로 우리를 삼키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형과 나는 겨울에 토끼나 너구리 따위를 잡으려고 산에 갔고, 때로는 영지버섯이나 칡을 캐기도 했다.
한낮의 숲은 셀 수 없이 많은 낙엽의 색과 물질감이 너무나 깊고 풍부하고 아름다웠다. 빛과 나뭇가지가 만드는 수많은 그림자, 아름다운 나무의 모습, 청명한 바람과 차갑고 맑은 공기가 그때 내겐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때 내 머릿속엔 온통 짐승뿐이었다. 숲에서 동물을 발견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도배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동물의 흔적을 쫓거나 우리에게 뭔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 숲의 구석구석을 헤맸다. 우리는 힘들지 않았고 매우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놀다 보면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게 주변이 어둑어둑해졌고, 숲 속에서의 어둠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우리를 삼킬 듯 덤벼들었다. 그것들이 우리 주변으로 스며들 땐 낮의 숲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은 오간 데 없고, 우리 마음에는 짐승에 대한 열정도 서서히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그 두려움은 느리지만 거대하고 어린아이인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인 어떤 것이었다. 주변은 어느새 아주 미미한 빛만이 남아 겨우 나뭇가지의 형태만이 감지되는 상태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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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형과 함께 토끼를 잡으려 뒷산 깊숙이까지 올랐다가 어둠에 쫓겨 황망히 하산했던 기억을 그린 문성식의 ‘숲과 아이’. 아름드리 나무 숲 사이로 잦아든 어둠과 어린 소년을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연필 드로잉으로 세밀하게 표현했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의 검푸른 공간과 같은 질감의 비현실적 공간이 내 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어둠 안에서 격정과 두려움을 느꼈다. 심장이 빨리 뛰었고 오직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할 때 우리는 부리나케 산을 내려와야 했다.
형과 나의 마음은 갑자기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격정적이 됐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깊은 어둠의 산을 서둘러 빠져나와 포도밭을 지나 흙길을 지나 이윽고 다다른 흰 시멘트길에 발을 내디뎠다. 아,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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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식의 ‘별과 소쩍새 그리고 내 할머니’. 할머니의 죽음을 독특한 정조로 그려낸 역작이다. |
빈 손으로 내려온 우리는 동네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향했다. 좀전의 우리를 엄습했던 두려움은 서서히 사라졌다. 형과 나는 집에 도착해 조금 전 일은 다 잊고 평소처럼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저녁을 식구들과 먹고, 9시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안방에서 할머니 젖을 만지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 글ㆍ그림= 문성식(화가)>

절실했던 경험과 기억을 촘촘히 배치함으로써 시퍼렇게 날이 선 문성식의 그림은 몹시 불편하면서도 이 세상 살아있는 것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어 아이러니하다. 현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풍경의 초상’이란 타이틀로 개인전(4월 7일까지)을 열고 있다. 이 전시회는 2007년 그룹전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개인전으로 드로잉 50여점과 신작 회화들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