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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화도주의 골프남녀] 블루헤런에서 만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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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헤런의 파3 홀인 16번 홀.


옛 이름은 '클럽700'이었던가.

십 수 년 전에 하이트진로그룹이 이 골프장을 사들여서 소나무만 백억 원어치 이상 옮겨다 심었다고 했다.

블루 헤런? 푸른 학을 부르려는 마음이었을까. 금방이라도 두루미 왜가리 떼가 날아와 앉을 듯한 노송들이 골프장 곳곳 울창한 자연림 숲 안에서 또 다른 무리의 숲을 이루고 있다.

그녀와 라운드는 2년여 만이다. 닥종이 인형을 만들던 여자…. 물기가 다 빠져 바싹 마른 닥종이처럼, 그녀는 야위어 있었다.

‘10키로 빠졌어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야무지고 탄탄하던 그녀에게….

블루헤런 골프장 1번 홀 메타세콰이어 나무 그늘이 길게 드리워진 페어웨이를 걸으며 나는 실없는 말을 건넸다.

“다이어트는 일단 성공했군요.”

그녀는 피식 웃었다.

낮은 산등성이를 깎아 다진 코스를 구비구비 따라서, 장성한 밤나무와 과년한 왕벚나무, 졸참나무들이 저마다 관능의 내음을 뿜어내고 있는 가운데 그보다 훌쩍 키 큰 낙우송들이 티 그라운드에서 페어웨이를 향해 줄지어 서 있는가 하면, 각 홀의 그린 주변 마다 곱게 늙은 장송들이 병풍처럼 무리 지어 서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노송 들을 모셔 온 걸까. 골프장 이름 그대로 푸른 왜가리 떼가 날아 앉으면 어울릴 선경(仙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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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헤런의 산딸나무.


“아, 코스가 예쁘네요.”

서너 홀 지나며 그녀가 탄식하듯 말했다. 표정에서 잠시 자기가 만든 인형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인형은 하나 하나 만들 때마다 점점 더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 밖에 못 만들겠어요. 만들다 보면 이렇게 돼요….’

몇 해 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닥종이 인형이라면 옛날 육칠십 년대 군밤 구워먹던 어린애들 순박한 모습 들로 만든 민예품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녀의 인형들은 병들고 지쳐서 고통스럽게 말라가는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모습 자꾸 만들면 작가 본인도 아파져요.’

몇 년 전 나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그녀는 그간 이유를 모르게 앓았다고 했다.

“골프라도 쳐야 살 것 같아서 요새 다시 시작했어요. 근데 너무 말라서 공이 잘 안 맞아요”
“나도 사업 스트레스가 심해서, 골프라도 안 치면 병 날 거 같아 나오는 거예요.”

함께 치는 동반자 친구가 말을 받았다. 역시 사업을 하는 또 한 명의 친구도 그렇다며 맞장구를 놓았다.

골프 코스에 대한 전문 지식은 없으나, 골프장이 앉은 땅은 저마다의 특성이 있고 그 특성을 조화로운 개성으로 살려낸 코스 앉힘을 좋은 골프장의 기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블루헤런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프장 가운데 손꼽히는 하나라고 여기며 사랑한다. 어디선가 뽑혀와 이곳에 뿌리 박힌 노송들의 사연과 마음은 알 수 없으나, 사람의 눈에는 그저 서늘하게 아름다울 뿐이다. 여주의 느긋한 평야가 원주의 산자락을 만나 오르막을 타기 시작하는 곳의 완만한 구릉에 학이 알을 품듯 날아 앉은 코스에서, 우리는 쇳대를 내지르고 더러는 아무데나 '알'을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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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헤런의 소나무 병뭉.


전반 9홀이 끝나갈 무렵 그녀의 공은 솟구쳐 날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그녀의 예전 골프 실력은 에누리나 덤 없이 쳐서 80대 초반 타수 정도로 야무졌다. 시작 몇 홀 동안 헛손질을 하며 어두웠던 그녀의 표정이 공이 맞아 나가기 시작하자 꽃잎 열리듯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 이 공기… 이 풍경…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아….”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저마다 사업을 한답시고 세상의 때를 뼛속까지 찌들어 묻힌 세 명의 남자와, 자기가 만든 인형의 넋이 씌어 병색 짙은 여자가 한 조가 되어, 신선이 노닐 듯한 땅 터를 파 헤집어 쇳소리를 깡깡 내고 공을 난사하며 '신선놀음' 흉내로 속세의 먼지를 뿌리고 다니는 것이다.

코스를 돌며 작가는 연신 예쁘다고 가벼운 탄성을 거듭 지었고, 점점 표정이 밝아졌다. 산딸나무 꽃이 활짝 피다 못해 스러지고 있는 꽃 숲에 이르러서는 기뻐서 금방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보통 실력의 플레이어가 좋은 스코어를 내기는 쉽지 않은 코스다. 티샷 위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우나 나무와 비탈과 숨바꼭질하듯 드러나는 페어웨이는 칼을 감춘 미녀 같다. 두 번 째 샷은 모험을 유혹 받는 자리에서 해야 하고 그린 위에는 섬세한 이야기들이 물결친다.

아쉽다면 그린의 풀이 길고 무뎌서 공이 잘 안 구르는 것이다. ‘명문’ 또는 좋은 골프장이라고 자칭하는 곳의 그린 위 볼 구름 스피드는 스팀프 미터 측정기계로 재었을 때 적어도 2.8미터 이상은 되는 것이 상식인데, 2.5미터 정도나 될까….

이곳에서 해마다 열리는 한국여자프로골프 하이트진로 챔피언십 대회 때의 그린 스피드가 3.4미터 정도 하던데, 그 정도는 아니어도 웬만큼은 빠른 느낌이 들어야 명성에 맞겠다.

손님을 많이 받으니 잔디 깍기를 덜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도 좀 싼 돈을 내고 라운드 했으니 불평은 이율배반이다. 우리는 불평으로 나쁜 스코어를 둘러댔고 예쁜 경치를 말하며 스스로 위안했다.

마지막 홀 늙은 장송들이 빽빽하게 품고 앉은 그린 위에서 마무리 퍼팅을 한 후, 우리는 남녀 가림 없이 서로를 안아주며 말 없이 위로했다.

'수고 했어요, 그 동안…… 애썼어요, 살아 오느라….'

의례적으로 여주 어디의 쌀밥정식 집에서 저녁밥을 먹으며 우리는, 빨리 흐르는 세월과 세상에 떠도는 몇 가지 추문, 저마다의 세상살이를 얘기했다. 이야기는 나누어졌으나 사실은 대개 독백이었고, 날이 저물자 영혼이 담기지 않은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언제 또 만날지는 모른다. 경치 고운 곳에서의 골프가 그녀 아픔을 얼마간이라도 어루만져 주었기를….

그리고 고작 제 하나 부박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받은 상처를, 자연에 생채기를 내어 지은 코스에서 위안 받기 바라는 이기적인 나를, 이 땅의 본디 주인인 푸른 학과 신선들이 어여삐 여겨 주시기를…. 글/류석무

*도화도주(필명)는 기업 경영자입니다. 하는 일이 골프에도 다소 연관되어 있어서 골프 상식에 밝고, 업무상 골프장을 많이 다니다 보니, 좀더 생각과 목적이 있는 골프를 하겠다는 생각에서 골프에세이를 쓰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문화잡지 편집인을 한 적이 있어 글쓰기에 익숙합니다(편집자주).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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