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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건식의 도의상마] 유도계의 큰스승, 소공(小公) 김종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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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 김종달.


'선생님! 저는 가르침에 따라 모교를 지켰으며 명예롭게 퇴진합니다.' 이 말은 지난 달 31일을 작고한 유도계의 큰스승, 고(故) 소공 김종달 전 용인대교수가 2001년 정년퇴임식을 앞두고 연구실에서 작성한 글의 시작부분이다. 이 한 구절에 평생 유도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녹아 있다. 여기서 ‘선생님’은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를 만든 고 이제황 선생을 말한다.

대한유도학교시절부터 국내 유도인재를 육성하는 데 최고로 인정받았던 김 교수는 지난 2일 가족장으로 소박한 장례를 통해 이제는 한국유도의 혼으로 남게 됐다. 생전 장례는 가족장으로 하고, 제자와 유도인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유언했던 그는 평소 소박한 삶을 살면서 제자들에게 귀감을 보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영원한 유도계의 큰스승으로 그를 존경한다.김종달 교수가 쓴 글과 제자들의 기억을 토대로 그의 삶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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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 대한유도학교의 모습.


청년 김종달, 스승과의 약속

청년 김종달은 1936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유도학교의 탄생지인 서울 중구 소공동 111번지로 자신의 본적을 이전할 정도로 학교와 유도를 사랑했다. 그의 아호를 ‘소공(小公)’으로 한 것도 모교와 유도에 대한 삶을 만들어준 곳이기 때문이다.

1958년 청년 김종달은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시청 앞에 있는 소공동 대한유도학교를 찾았다. 6.25 직후 혼란한 한국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전국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던 유도학교에는 항일영웅이던 이범석 장군과 유도계의 민족주의자였던 이제황 선생이 있었다. 당시 김종달의 동기는 26명으로 현재 세계생활체육총연맹(TAFISA)의 총재인 장주호 전 경희대 교수를 비롯해 미주지역에서 성공한 사업가 등 쟁쟁한 인물들이 여럿 있다.

초창기 대한유도학교는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함께 소공동 건물을 사용하던 대한유도회와 한국유도원은 대한유도학교 구성원들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만 해도 유도학교 출신들은 교사나 경찰, 군장교, 그리고 해외진출 등 다양한 진로가 있었다. 하지만 청년 김종달은 어려운 학교를 위해 “다들 떠나도 너만은 끝까지 남아서 모교를 지켜야 한다”라는 스승 이제황 선생의 유훈을 지키려 애를 썼다. 그는 “신입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모교인 유도학교와 흥망성쇠를 함께 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김종달이 유도 및 유도학교와 평생 함께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제황 선생의 영향이 크다. 그는 이제황 선생에 대해 “스승이자 아버지 같았고, 손을 꼭 쥐어주며 눈물을 주르르 흘리던 이제황 선생의 속깊은 애정이 나를 평생 유도인으로 남게 했다”고 회고했다.

유도학교의 진가를 널리 알린 것은 1958년 김종달이 대학 1학년 때 열린 제2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58)였다. 한국전쟁 직후로 어려운 경제여건에 일본까지 갈 항공료가 없어 학교 교수들이 사비를 털어 여비를 마련했다. 김위생(전 유도학교 교장)이 처음 국제대회에 출전하였고, 그 뒤를 이어 6년 뒤 1964년 도쿄올림픽에 청년 김종달은 김의태와 함께 도쿄 땅을 밟았다. 김의태가 동메달, 김종달이 4위에 오르면서 정책종목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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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2월 미국 <블랙벨트> 지에 소개된 김종달 교수(왼쪽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와 이제황 선생.


김종달은 1968년 결혼해 대한유도학교 교수(현 용인대)에 재직하면서 국가대표팀을 맡아 유도지도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아시아유도심판시험에 합격해 심판으로도 활동했다. 1977년에는 당시 유도 7단으로 미국 미시건주립대학으로 가 1년간 유도를 지도했고, 이후 국제심판으로도 활동하였다.

1980년 대한유도회 이사로 선임되어 유도행정에 참여했고, 1981년에는 대한유도회 경기이사이면서 국가대표 코치로 선임되어 1982년 쿠웨이트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 참가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한유도회 심판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유도대표팀은 김종달 교수를 단장으로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김 교수는 그때 김상철 감독과 장은경 코치, 천길영 코치 등과 함께 김재엽, 윤용발, 안병근, 김건수, 조용철 등 스타선수들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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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한국의 유도선수들. 김의태가 왼쪽, 김종달이 가운데다. [이미지=경향신문 1964년 10월 19일자]


한국유도의 스타 발굴로 일본을 넘다


한국유도가 일본을 넘어서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53년 개교 이후 12년이 되던 1965년 해부터 스타급 유도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도학교의 소공동시절 각종 국제대회에서 박길순(65-66년), 김정행, 김병식(이상 67년), 김상철, 장인권(이상 69년), 최종삼, 이용덕(이상 71년), 한성철(72), 주창옥, 박석병(이상 73년), 이한석(75), 장은경(76) 등 배어난 후배이자 제자들이 60, 70년대 한국유도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유도학교가 가장 힘들었던 풍납동 시대에서도 좋은 선수들은 계속 나왔다. 1980년 대체올림픽으로 개최된 제2회 전미 오픈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윤익선(현 용인대 교수)과 1981년 세계유도선수권에 한국의 사상 첫 금메달을 딴 박종학(현 청주대 교수), 그리고 1984년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안병근(현 용인대 교수)과 은메달리스트 황정오, 동메달리스트인 조용철(현 용인대 교수) 등이 일본유도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1985년 용인캠퍼스 시대가 되면서 환경은 한층 좋아졌다. 김종달 교수는 "88 서울 올림픽의 동메달리스트인 조용철, 1989년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김병주(현 공군사관학교 교수)와 동메달리스트인 윤현(현 용인대 교수), 그리고 1991년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김미정(현 용인대 교수)과 문지윤, 같은 대회 동메달리스트인 정훈(현 용인대 교수), 1992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미정과 문지윤 등이 한국 유도의 최고 전성기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김종달 교수는 교수 시절 매일 유도장을 찾아 제자들과 함께 도복 깃을 잡은 것으로 유명하다. 서울 풍납동에서 용인으로 이전한 1985년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던 일이다. 교수가 된 제자와 재학생인 제자들과 운동 후 기숙사에 있는 사우나에서 함께 몸을 풀기도 했다. 방학 때는 선수단인 훈련단과 함께 땀을 흘리며 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용인대 유도장을 생전에 ‘영혼의 도장’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제자들이 세계유도를 주름잡을 수 있게 만든 터전이었고, 수많은 올림픽스타를 발굴한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한국이 일본 유도를 이기며 세계적인 유도강국으로 우뚝 서자 김 교수는 이곳을 ‘한국 유도의 요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애정을 뒤로하고 그는 2001년 8월 모교인 용인대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정년퇴직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남아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역할을 했다.

필자는 대학원시절 원로교수였던 김 교수와 자주 만났다. “어떻게 공부하느냐?”, “힘든 것은 없느냐?”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와 밥을 함께 먹자고 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원로선생님으로서 어려웠고, 전공이 다르다 보니 몸으로 함께 하는 시간이 없었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따뜻한 식사를 한 번이라도 모셨어야 했는데, 돌아가신 이후 조문을 받지 말고 가족이 조용히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들었을 때 마음이 뭉클해졌다. 항상 배풀기만 하고, 받으려 하지 않았던 스승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허건식 박사는 용인대에서 무예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세계무예마스터십위원회,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국립태권도박물관, 예원예술대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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