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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프상식 백과사전 93] 50년 맞은 KPGA 한국 남자 우승사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지금으로부터 86년 전인 1932년. 15세의 어린 소년이 경성골프클럽 군자리 코스를 찾아간다. 캐디 마스터인 조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조카로부터 캐디 마스터실 보조 역을 제안받으면서 골프장에 취직하게 된다.

연덕춘이라 불린 소년은 골프장에서 일하면서 일본인 헤드 프로로부터 진짜 골프 클럽 1개를 선물 받은 후 골퍼의 꿈을 키웠고 열심히 연습한 결과 1년 후에는 스크래치 플레이어가 된다. 당시 골프장의 일본인 헤드 프로가 고국으로 돌아가자 ‘조선인 헤드 프로를 앉히자’는 여론이 일었고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던 그가 캐디 마스터였던 김종석, 식당 주임이었던 배용산과 겨룬 테스트에서 이기면서 일본 골프 유학 대상자로 낙점됐다.

34년 12월 일본 도쿄 가나가와현 소재의 후지사와CC에서 본격적으로 골프 수업을 받은 연덕춘은 36년 2월에 일본 관동골프연맹으로부터 프로 자격을 획득한다. 한국 최초의 프로 골퍼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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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상, 문기수, 이일안 등 KPGA 창립멤버들이 지난해 KPGA선수권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12인이 모여 68년 KPGA 창립
한국프로골프협회(KPGA)가 설립된 68년에 프로테스트를 통해 선수를 선발할 때까지는 정식으로 프로 자격을 획득한 선수가 없었다. 68년 이전까지의 프로 탄생은 다음 세 가지 중의 하나였다. 첫째는 프로협회가 창립되기 10년 전인 58년부터 시작된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자, 둘째는 현재의 대한골프협회 기능을 발휘했던 서울컨트리클럽에서의 인정, 셋째는 당시 프로 지망생을 총괄했던 프로 1호 연덕춘의 인정이었다.

연덕춘의 프로 계보를 이은 것은 신봉식과 박명출이었다. 연덕춘은 맨 처음 신봉식을 가르쳤고 서울컨트리클럽 직원에서 프로가 된 박명출, 배용산을 프로 골퍼로 내세웠다. 박명출은 나중에 영국에서 열린 골프 월드컵에 연덕춘과 나란히 출전한다. 오늘날 시즌을 마친 뒤에 평균 최저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는 덕춘상을 주고, 신인중에 최고의 성적을 거둔 이에게는 명출상을 준다.

1968년 KPGA가 발족된 이후는 정관 규정에 따라 테스트를 통해 프로 골퍼 자격을 부여하게 됐고 협회 창립을 주도했던 12명은 테스트 없이 프로 골퍼로 등록했다. 회원 1번은 연덕춘이었고 뒤이어 신봉식(2번), 박명출(3번), 배용산(4번), 김복만(5번), 한장상(6번), 한성재(7번), 김성윤(8번), 홍덕산(9번), 이일안(10번), 문기수(11번), 조태운(12번)이 초대 12명의 KPGA 회원이 된다. 그리고 올해가 KPGA의 50년이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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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상 KPGA고문은 72년 일본오픈 우승 등 생애 22승을 달성했다. [사진=KPGA]


60~70년대는 한장상, 김승학
연덕춘은 1941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했지만 태평양전쟁과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선수 생활이 짧았다. 생애 2승(일본오픈과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 그쳤지만 그는 한국의 최초 프로이자 협회 창립을 주도했던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연덕춘의 계보를 이어받은 것은 한장상이었다. 60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서 첫 승을 올린 그는 70년대 중반까지 톱 스타였다. 특히 72년에는 한국오픈에 이어 일본의 내셔널 타이틀인 일본오픈에서 우승했고, 그랜드모나코오픈에서도 정상에 오르면서 ‘아시아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일본오픈 우승은 연덕춘 이후 31년만의 일이었으며 그 자격으로 이듬해인 73년 오거스타내셔널에서 열리는 마스터즈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출전하는 영광도 안았다. 82년 쾌남오픈에서 생애 22승째를 거둔 것이 그의 마지막 우승이다.

70년대 후반의 스타는 김승학이었다. 그는 1973년 아시아서키트 필리핀오픈에서 첫 승을 거두는 대박을 터뜨려 아시아 스타 대접을 받았고, 그 자격으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디오픈에 초청받기도 했다. 진가는 1976년~80년에 발휘된다. 디오픈에 다녀온 후 무리한 연습으로 허리 부상을 당하더니 절치부심 끝에 76년부터 80년까지 5년 동안 7승을 엮어내면서 상승세를 이었다. 하지만 허리 부상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30대 중반에 생애 9승을 끝으로 은퇴했다. 이후에는 KPGA 협회장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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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호는 2006년 매경오픈에서 50의 나이에 최고령 우승하면서 43승을 달성했다. [사진=KPGA]


최상호, 43승으로 최다승
1977년 7번 만에 프로 테스트에 합격한 최상호가 생애 43승을 기록할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데뷔 이듬해인 78년 여주오픈에서 첫 승을 올린 그는 96년 영남오픈에서 정상에 오를 때까지 19년 동안 단 두 해(79, 88년)만 제외하고 매년 승수를 추가했다. 꾸준한 연습과 체형과 체력을 고려한 스윙 개발, 철저한 자기 관리가 맞물린 결과였다. 이 기간에 최저타수상인 덕춘상을 11회나 수상했고 상금왕은 9회를 차지했다.

최상호는 96년 최경주가 나타나기까지 80년대부터 90년을 아우르는 한국의 ‘간판 스타’였다. 특히 그는 2005년 홈 코스(남서울CC)에서 열렸던 매경오픈에서 만 50세 나이에 최고령으로 정상에 오르면서 관록이 무엇인가를 증명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대회에 출전해 지난 2015년에는 60세4개월12일 나이에 매경오픈에서 최고령으로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80년대는 최윤수, 이강선이 활동하면서 11승과 8승의 기록을 세웠고 90년대엔 박남신이 활약했다. 최상호보다 5년 늦게 프로에 입문한 그는 ‘가리워진 스타’였다. 생애 21승을 기록해 프로 사상 최다승 4위를 기록하지만 ‘만년 2위’나 ‘2인자’라는 수식처럼 최상호의 그늘에 있었다. 2007년에는 금호아시아나오픈에서 48세에 연장 접전 끝에 우승하기도 했다.

90년대 일본투어 시장을 개척한 1세대는 임진한, 김종덕이며 그 이후의 일본에서 꾸준히 선수생활을 한 2세대는 허석호, 장익제다. 김종덕은 일본JGTO투어에서 4승을 했으나 이후 일본 시니어투어까지 진출해서 활동하고 있다. 허석호는 2001년 일본에 진출한 이래 2009년까지 8승을 거뒀다. 2006년 미즈노오픈에서 우승하면서 디오픈 출전권을 얻는다. 그해 디오픈에서 거둔 11위는 역대 한국선수 중 가장 높은 순위다.

강욱순은 아시안투어의 개척자이자 최고 자리까지 정복한 한 스타다. 95년 국내 첫 승(일간스포츠오픈)과 2승(챔피언시리즈)을 차례로 올린 후에 아시안(당시엔 아시안서키트)투어에 전념했고 이듬해인 96년에 플레이어즈챔피언십과 쿠알라룸푸르오픈에서 2승을 올리면서 그해 상금왕에 올랐다. 98년에도 2승(페리어홍콩오픈, 오메가PGA챔피언십)으로 2번째 상금왕에 등극했다. 아시안투어에서의 활약을 발판으로 99년 한국에서 상금왕에 오르면서 톱 스타로 군림했다. 강욱순은 2009년 제주도에서 열린 토마토저축은행오픈까지 KPGA는 총 12승을 거두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년대 초반까지 강욱순이 활동하던 시기에 프로에 데뷔해 국내 투어를 3분한 이가 최광수, 신용진이다. 최광수는 우정힐스 소속프로로 있으면서 46세에 한국오픈을 우승하면서 통산 15승을 거뒀다. 부산 출신의 신용진은 장타를 휘두르면서 8승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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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주는 2011년 더플레이어스 우승 등 PGA투어에서 8승을 이뤘다.


해외 투어의 개척자 최경주
최경주는 한국 남자 골프를 질적으로 한 계단 향상 시켰다. 1993년 프로에 입문한 2년 후에 팬텀오픈에서 첫 승을 올렸다. 96년에는 한국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상금 1위를 차지했고 이듬해는 3승(팬텀오픈, KPGA선수권, 슈페리어오픈)으로 상금 랭킹 1위를 굳혔다.

98년은 그에게 해외 진출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해 12월 미국PGA투어 퀄리파잉스쿨에 응시해 탈락했고 결국 일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99년엔 일본에서 2승(기린오픈, 우베고산오픈)을 한 뒤 미국PGA투어도 재도전 끝에 턱걸이(35위)로 통과했다. 2000년 다시 퀄리파잉스쿨로 내려가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2002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PGA투어 컴팩클래식에서 우승하고 템파베이클래식에서 다시 우승을 추가했다.

최경주는 2007년 메모리얼토너먼트와 AT&T내셔널에서 우승했고, 2011년 더플레이어스 우승으로 PGA투어 통산 8승을 거두었다. 국내에서도 16승, 유러피언투어 1승, 일본투어 2승을 합쳐 종합 28승을 쌓아올렸다.

양용은은 2009년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인 PGA챔피언십에서 타이거 우즈를 꺾고 우승하는 등 미국과 유럽에서 2승씩, 일본에서 4승, 그리고 국내 3승을 기록했다. 최근 몇 년간 저조했으나 올해는 일본JGTO투어에서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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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섭, 김경태는 아마추어 시절의 2승씩 추가. 노란색은 현역 선수들.


20~30대 젊은 선수들
한국프로골프협회 50년 역사에서 국내외 투어에서 생애 두 자리 수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지난해 진주저축은행카이도오픈에서 우승한 강경남을 비롯해 12명에 불과하다. 가장 앞선 선수는 2007년 프로 데뷔한 김경태다. 아마추어 시절인 2016년에 2승을 거뒀고, 루키해에만 3승을 거뒀다. 2008년 일본에 진출한 뒤로 일본에서 13승을 쌓으면서 국내외 통산 19승(아마추어 2승 포함)을 기록했다.

김경태가 한국 선수 중에 일본투어 역대 최다승을 기록했다면 동갑내기인 배상문은 PGA투어 무대를 개척한 주목할 선수다. 국내 투어에서 9승을 쌓은 배상문은 2011년 일본투어에서 일본오픈 등 3승을 거둔 뒤로 이듬해 미국에 진출했다. 2013년 바이런넬슨챔피언십, 2년 뒤인 2015년 프라이스닷컴오픈에서도 우승했다. 이를 계기로 그해 송도에서 열린 프레지던츠컵에 한국 선수로 출전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골프 대회가 한 시즌에 20여개 안팎에 이르고 선수층이 두터워지면서 한 시즌을 휩쓰는 괴물 같은 선수의 출현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한국 남자 프로골프가 반백년을 맞아 5승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총 32명이다. 이중에 현재 투어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역은 14명이다. 물론 이들은 아직 쌓아야 할 승수가 더 남아 있다.

의미 있는 건 처음에는 국내 투어에만 그쳤으나 최경주를 비롯해 해외 큰 무대로 과감하게 도전했고 이제는 김시우, 안병훈, 왕정훈 등의 20대 젊은 유망주들이 꾸준히 해외 무대를 두드리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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