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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골프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3대 역전드라마 (2) - 1955년 US 오픈. 벤 호건을 꺾은 잭 플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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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오픈 우승컵을 들고 있는 잭 플렉.


지난 주 칼럼에서 소개한 프란시스 위멧의 이야기가는 미국의 <골프채널>이 선정한 골프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3대 역전드라마에서 1위로 선정됐다. 2위는 1955년 US 오픈에서 ‘골프의 신’으로 추앙 받던 벤 호건에게 역전승을 거둔 무명골퍼 잭 플렉(Jack Fleck, 1921~2014)이다.

벤 호건의 전성기

벤 호건은 미PGA에서 1947년에 7승, 1948년은 메이저 2승을 포함해 11승을 올리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호건은 1949년 2월 자동차 충돌사고로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레이 하운드 버스와 정면 충돌했던 벤 호건은 하체의 11개 뼈가 부러졌다. 담당의사는 벤 호건이 더 이상 골프를 칠 수 없을 것이고 어쩌면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호건은 1년 후 PGA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고, 1950년 US 오픈에서 우승하며 당당히 재기에 성공했다. 시합 때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밴드로 단단히 묶고 절뚝거리며 걷는 벤 호건을 보며 관중은 환호했다. 이어 1953년 마스터스, US 오픈, 디 오픈을 모두 우승하며 ‘호건슬램’을 달성하자, 골프팬들은 그를 ‘골프의 신’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자동차 사고 이후에만 메이저 6승을 하여 총 9승을 달성한 벤 호건의 메이저 우승 행진은 계속될 것 같았다.

골프클럽 '벤 호건'

1954년 벤 호건은 골프클럽 제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의 스폰서였던 맥그리거 클럽의 품질에 불만을 품어오다가 자기가 직접 최고 품질의 클럽을 생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고향 텍사스에 공장을 차리고 ‘벤 호건’ 브랜드를 내걸었기에 그의 명예를 걸고 최고의 클럽을 생산한다는 사업계획을 세웠다. 1954년 1차 생산 제품이 입고됐다. 품질 검사를 한 호건은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는 하급 품질인 것을 발견하고 전량 폐기할 것을 명령했다. 금액으로 10만 달러가 넘었다. 당시 US 오픈의 우승상금이 6,000달러였으므로 얼마나 큰 금액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벤 호건을 찾아온 무명의 잭 플렉

1955년 아이오와 주의 시골 골프클럽에서 프로로 일하던 잭 플렉이 호건의 공장을 찾아왔다. 그는 1955년 PGA 투어카드를 받은 루키였는데 루키시즌에 충분한 상금을 벌지 못하면 투어를 포기하기로 부인과 약속했다고 말했다. 자기의 영웅 벤 호건을 찾아온 목적은 벤 호건 골프클럽을 한 셋트를 사고, 투어 생활에 대한 조언을 받고 싶어서였다. 잭 플렉의 사정 이야기를 듣던 벤 호건은 자기의 무명시절이 떠올랐다. 프로 데뷔 이후 10년 동안 우승을 못하고 떠돌이 신세였던 자기의 처지가 생각나서 잭 플렉을 도와주고 싶었다.

벤 호건은 시험생산한 클럽 한 세트를 플렉의 스펙으로 피팅하여 선물했다. 아직 제품이 나오지 않았던 웨지 2개는 6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US 오픈 때 만나서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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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US 오픈에서 잭 플렉과 벤 호건이 사용한 '벤 호건 아이언 세트'(왼쪽). 오른쪽은 잭 플렉이 4라운드 18번홀에서 사용한 7번 아이언.


1955년 US 오픈

1955년 US 오픈은 파 70으로 세팅된 샌프란시스코의 올림픽 클럽에서 개최됐다. 시합이 시작되기 이틀 전 벤 호건은 올림픽 클럽의 라커룸에서 약속했던 웨지 2개를 잭 플렉에게 전달했다. 잭 플렉은 웨지를 받으며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시합 첫날 면도를 하던 잭 플렉은 누가 큰 소리로 “너는 US 오픈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을 들었다. 너무 똑똑히 들려서 뒤 돌아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벤 호건의 팬들은 그가 역사상 처음으로 US 오픈 5회 우승의 대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대회가 시작되자 치열한 선두 경쟁으로 리더보드가 복잡해졌고 72-73타로 5오버파가 된 호건은 1타차 공동 3위였다. 3라운드를 마치고 7오버 파의 벤 호건이 드디어 선두에 나서며 전국의 골프 팬들을 열광시켰고, TV는 흑백 화면으로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1타 차로 따라오고 있는 최고의 라이벌 샘 스니드만 제압하면 우승이 확실시된다고 예상했다. 3타 차로 공동 6위에 있었던 무명의 잭 플렉을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4라운드에 호건이 70타를 치고 들어왔고 샘 스니드가 부진하자 호건의 우승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중계방송 해설을 맡았던 진 사라센은 지나가던 벤 호건에게 5회 우승을 상징하는 다섯 손가락을 펴서 보여주는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호건은 시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거절했고 기자회견장에도 가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잭 플렉을 보라!'

플레이 중인 선수들 중에서 이론적으로 호건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5홀을 남기고 1타 차로 따라가는 잭 플렉뿐이었지만 그가 연장전에 갈 수 있는 확률은 1/8,000이었다. 잭 플렉이 14번 홀에서 보기를 하자 벤 호건의 우승은 더욱 확실해졌다. 나머지 4홀은 파로 끝내기도 어려운 코스세팅이었다. NBC는 5시에 골프 중계를 끝마치면서 벤 호건이 우승트로피를 받는 모습을 화면으로 내보내자고 제안했지만 호건이 거절했다. 호건은 조용히 기다리기를 원했다.

15번 홀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건은 클럽하우스에 있어도 소리만으로 코스의 사정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제 1타 차이지만 가장 어려운 파4 17번 홀을 파로 넘길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벤 호건도 9번의 라운드 중 온그린은 단 한 번이었다. 그런데 이 홀에서 플렉은 완벽한 드라이브 샷에 이어 3번 우드로 온그린에 성공하여 파를 잡아냈다. 호건은 이기든 지든 승부가 나기를 원했고 연장전만은 피하고 싶어했다.

18번 홀은 337야드 오른쪽 도그렉 홀인데 티샷을 페어웨이로 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3번 우드로 티샷을 한 플렉의 공은 왼쪽 페어웨이를 살짝 벗어난 퍼스트 컷 러프에 멈춰서 라이가 좋았다. 이제 125야드 어프로치샷에 승부가 달렸다. 깃발의 위치는 좁은 그린 앞 오른쪽 벙커 옆인데 뒤에서 앞으로 내리막이었다. 지금의 프로들은 52도 웨지 정도를 치겠지만 당시에는 8번 또는 9번 거리였는데 공이 그린에 떨어져서 백스핀이 걸리면 그린 밖으로 굴러 내려올 것이 틀림없었다.

플렉은 본능과 상상에 의한 샷을 쳐야 했는데, 그가 선택한 클럽은 7번 아이언이었다. 7번 아이언으로 스핀을 제거하고 높은 탄도로 그린의 앞에 떨어뜨려서 굴러가는 샷을 디자인 한 플렉은 짧은 백스윙과 긴 팔로우에 높은 피니시를 하며 완벽한 샷을 만들어 냈다(60년 전의 그 샷은 아래 유튜브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공은 원 바운드로 그린에 올라가서 2m 거리에 멈췄다. 플렉은 시간을 끌지 않고 24초 만에 퍼트를 했는데 내리막 버디 퍼트는 홀 가운데로 들어갔고 3언더파 67타로 데일리 베스트가 되었다. 4일 내내 언더파의 라운드가 4번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플렉의 점수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7오버파로 동타가 된 두 선수는 다음날 18홀 연장전을 벌이게 되었고 짐을 쌌던 벤 호건은 클럽을 다시 꺼내야 했다.

■ 1955년 US 오픈 4라운드 18번 홀에서 나온 잭 플렉의 세컨드 샷



18홀 연장전

다음날 18홀 연장전에서 벤 호건 클럽을 사용하는 단 두 명의 선수가 만났다. 자동차 사고 후 언제나 체력이 떨어져서 후반에 불리했던 벤 호건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아직도 벤 호건의 승리를 예상했다.

연장전에서 벤 호건의 샷은 플렉을 압도했지만 플렉이 퍼팅을 훨씬 잘했다. 퍼트 숫자가 5번이나 더 많았던 호건은 10번 홀까지 3타차로 뒤졌었지만 단 1타로 따라 붙은 채 18번 홀에 도착했다. 아직 희망은 있었다. 그러나 벤 호건의 티샷은 훅이 나면서 왼쪽 깊은 러프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문제였던 훅의 흔적이 남아서 결정적인 순간에 호건을 절망시켰고, 호건의 신화도 끝이 났다. 결국 호건이 72타, 플렉이 69타로 새 챔피언이 탄생했다. 물론 이후 호건의 US 오픈 5승의 신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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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운명의 US 오픈 연장전에 나선 벤 호건(왼쪽)과 잭 플렉.


연장전이 끝난 후

패배한 벤 호건은 플렉의 우승을 따뜻한 웃음으로 축하해 주었다. 기자회견에서 최소한 2타차 우승을 확신했었다는 말을 하며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US 오픈 우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호건은 1956년 US 오픈에 출전했고 또 다시 2위에 머무르는 불운을 이어갔다. 플렉의 의해서 끊어진 메이저 우승의 행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골프의 신은 메이저 우승을 추가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무명의 잭 플렉에게 마지막으로 전달했던 웨지 2개는 호건의 운명을 바꾸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벤 호건은 그 웨지를 주었던 것을 후회했을까?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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