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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이 시대 최후의 헝그리 복서, 오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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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잡지의 표지모델이 된 현역시절의 오장균.


인트로 - 두 복싱인의 화합

지난해 한국 아마복싱의 큰별인 조석인(36년, 익산) 회장이 타계하자 장지에서 두 손을 잡고 굳은 결의를 한 두 복싱인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떠난 빈 공간을 채우며 다시 한 번 전북 복싱의 재건을 위해 힘을 합하기로 한 것이죠. 주인공은 현재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인 63년생 동갑내기 이철승, 한양희입니다.

두 사람은 평소 마주보며 달리는 열차처럼 충돌이 잦았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조석인 회장의 소천을 계기로 묵은 감정을 털어냈다고 하네요. 주역(周易)에 나오는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 其利斷金, 두 사람이 마음이 같으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를 수 있다)’이라는 글귀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호랑이도 단독으로 사냥을 하면 성공확률이 10% 미만이지만 두 마리가 연합해 작업(?)을 하면 성공률은 놀랍게도 80%에 육박한다고 하네요.

국제심판이기도 한 이철승(전주덕진공원체육관관장)은 전북체고 시절 3관왕을 이룩하고 한체대에 진학해 이해정, 허영모, 송경섭, 진행범, 안영수 등과 대학무대를 평정한 ‘공포의 83학번’이었죠. 여기에 그는 복싱패밀리였습니다. 숙부는 1960년 중반 임병모, 박형춘 등과 함께 중량급을 평정했던 이홍대 씨이고, 딸도 경북체고시절 국가대표 상비군을 지냈죠. 전라북도 심판장을 겸하고 있는 한양희는 현재 신재생에너지사업체(중소형풍력)의 대표로, 경제력이 있는 복싱인이죠. 큰 딸이 작년 한체대를 졸업한 재원이라 합니다. 개인적으로 두 분의 화합이 귀감이 되어 우리 복싱인들이 시멘트처럼 똘똘 단합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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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왼쪽), 한양희 심판위원.


복싱과 탁구


지난 5월 양천구에서 개최된 생활체육대회에서 오늘 스토리의 주인공인 오장균(62년생,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과 해후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옆길로 빠지면 오장균과 얘기를 나누던 중 우연히 귀한 분을 뵈었습니다. 바로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 여자단체전에서 이에리사, 정현숙과 함께 우승을 일궈낸 박미라(52년생, 양천구체육회 수석부회장) 씨였습니다. 박 부회장은 74년에 선정된 체육종신연금 대상자 18명 중 한명입니다. 18명 중 복싱인이 송순천, 지용주, 장규철, 한수안, 강준호 등 5명이나 됐으니 당시 복싱의 위상이 느껴집니다.

어쨌든 탁구와 복싱에 대해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고, 필자가 오른손으로 탁구의 드라이브하던 모션과 복싱의 라이트훅을 치는 장면을 연달아 보여 주자 박미라 부회장은 “어머, 정말 똑같네요”라며 반색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프로복싱 세계랭커 출신인 양석진(화랑)과 진윤언(88체) 등은 원래 탁구선수였습니다. 이들의 라이트 훅이 일품이었던 이유가 있는 셈이죠.

오장균은 세 차례에 걸쳐 국내 챔피언과 두 체급에 걸쳐 동양 챔피언에 오른 15년 경력의 베테랑 복서였습니다. 유년시절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복싱에 입문한 것은 세광고를 졸업하고, 1980년 6월 강창수 관장이 운영하는 조치원체육관에 등록하면서였죠. 1881년 10월 오장균은 이동춘(대구대산)과의 프로데뷔전에서 4회 판정패를 당하며 통산 48전(35승<14KO>9패4무)의 서곡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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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수영 양천구청장, 홍성민 용인대SM체육관 관장, 박미라 수석부회장, 홍진표 부회장.


뒤늦게 시작한 복싱


오장균은 3번째 경기에서도 박성순에게 판정패를 당했지만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8연승을 거두며 상승세를 탔습니다. 제동이 걸린 것은 83년 9월 양홍규(62년생, 용인대)와의 경기였습니다. 양홍규는 1978년 세계선수권 선발전과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선발전에 출전하는 등 아마추어에서 잔뼈가 굵은 강자였습니다. 오장균은 양홍규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후 1984년 장태일(63년생, 태양체)에게 8회 판정패를 당했습니다. 이때 강창수 관장은 제자가 큰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88프로모션으로 입양(?)을 보냅니다.

조치원 시절 오장균은 가건물인 허름한 체육관에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끼니마다 삼계탕(?)을 먹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삼계탕이란 라면에 계란을 풀어서 먹던 ‘라면탕’을 말합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웠죠. 특식으로 돼지껍데기를 사다가 볶아서 먹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그는 회고했습니다.

아무튼 85년초 88프로모션으로 입성한 오장균은 한국 복싱의 역대급 트레이너인 이영래 선생의 체계적인 지도를 받으며 비약적인 발전합니다. 오장균은 복서 겸 파이터로 선천적으로 연체동물처럼 유연한 몸놀림을 가졌고, 어뢰처럼 발사되는 라이트 어퍼컷이 주무기였습니다. 1985년 3월 오장균은 한국 주니어밴텀급 챔피언 방승현(63년생, 원진체)에게 도전, 한 수 위의 기량으로 무난한 판정승을 거둬 주목을 받습니다. 방승현은 서울체고 시절부터 동기생인 이해정, 안영수와 함께 전국을 평정한 간판복서였기에 오장균의 주가는 치솟았죠.

그러나 아뿔사, 그 경기가 오장균의 88프로모션 마지막 경기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오장균은 트레이너와의 불화로 젖과 꿀이 흐르는 88프로모션을 등지며 낙향했죠. 이후 1986년 장태일(63년생. 태양체)에게 3회 KO패를 당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태극약품체육관에 입성해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1987년 3월 오징균은 박영덕과 한국 밴텀급 타이틀을 벌여 5회 KO승로 다시 한국 정상에 올랐습니다. 당시 한국챔피언이 되면 소속사에서 급료가 나오기로 돼 있었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큰 좌절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생활고에 시달린 것입니다. 다행히 체육관 측의 베려로 한동안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준 덕에 오장균은 전열을 정비해 4차까지 방어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1989년 7월 조치원체육관에게 삼계탕(?)을 같이 나눠먹던 4년 후배인 민영천(66, 조치원, 14전전승 8KO승)과 라이벌전을 벌여 1회 다운을 극복하며 판정승을 거뒀습니다. 이어 후에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하다나카 기요시(22승<15KO>1무2패)와의 본 원정경기에서 지독한 텃세를 극복하고 무승부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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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이자 라이벌인 양홍규(왼쪽)와 오장균.


운명의 세계타이틀매치


이처럼 주가가 상승하자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92년 7월 WBC 밴텀급 챔피언 빅토르 나바렐레스(당시 29세, 멕시코, 31승<17KO>10패)의 1차 방어전 상대로 낙점된 것이죠. 오장균은 비장한 각오로 훈련에 임했습니다. 세계 타이틀매치의 장소는 미국의 잉글우드였습니다. 당시 자양동에서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의 지하방에서 살던 오장균은 임신한 아내를 위해서라도 챔피언 벨트를 꼭 차지하고 싶었죠. 맹훈련을 하던 어느날 트레이너가 “장균아. 이번 시합에 익수제약 마크가 박힌 트렁크를 입고 경기에 출전해라”라고 하자 오장균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참 소박합니다. 평소 스폰서 없이 훈련하던 오장균에게 매월 일정액을 조달해 주던 선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선배는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당구장 이름이 새겨진 트렁크를 출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로 트레이너와 오장균은 대립각을 세우면서 불협화음이 시작됐고,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사이가 되고 맙니다.

오장균은 혼자 버스를 타고 스파링을 위해 하루는 신당동에 있는 중앙체육관으로, 또 하루는 숭인동 와룡체육관으로 ‘동냥’ 스파링을 하며 실전에 대비했습니다. 돈이 없으니 주말이면 공사판에서 속칭 ‘노가다’를 뛰며 생활비를 벌면서 말입니다. 오장균은 트레이너와는 형식적인 대화 이외에는 말을 섞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혼연일체가 돼 똘똘 뭉쳐도 챔피언 등극이 쉽지 않은 상태인데 이런 냉각관계 탓에 미트 한 번 제대로 치지 못하고 훈련을 마무리했습니다. 평생에 한 번 잡기도 힘든 세계타이틀매치에서 오장균은 예상대로 한 차례 다운을 당하는 등 일방적으로 난타 당했습니다. 의지 하나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종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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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조병권 관장, 문성길 챔프, 오장균, 김장섭 양천구체육회 이사.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안타까운 스토리입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오장균은 아내의 울부짖음을 들었죠. 그의 아내는 “고기국 한 번 먹이지 못하고 떠난 게 가슴이 찢어진다”고 울부짖었으며 “이럴 줄 알았으면 전세 보증금이라도 빼서 고깃국이라도 먹였을 것”이라고 한탄했습니다.

당시 뱃속에 있던 오장균의 아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졸업반이라고 하네요. 지금도 오장균은 ‘건설현장의 역군’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조치원고등학교 재학시절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자랑스런 아들이 오장균의 인생에서는 챔피언 등극 이상의 큰 훈장이라고 합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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