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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 (15) 동남아 팀이 월드컵에 나갈 수 있을까? - 럭키 루저
<헤럴드스포츠>가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를 연재합니다. 앞서 연재된 시즌1이 기존에 출판된 단행본 '킥 더 무비'를 재구성한 것이라면 시즌2는 새로운 작품을 대상으로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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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영화로 촉발된 태국과 라오스의 갈등


2006년 초, 태국과 라오스는 한 영화 때문에 갈등을 빚었습니다. 바로 <럭키 루저(??????? ????????)>라는 태국 축구 영화였죠. 태국인 축구 감독이 라오스 대표팀을 맡아 독일 월드컵에 진출시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라오스 정부는 이 영화 개봉 직전에, 영화가 라오스 인들을 비하하고 있다며 항의했습니다. 라오스 인들이 냉동 컨테이너 안에서 추위를 견디고, 백인들을 이기기 위해 머리를 노랗게 머리를 염색하는 장면을 문제 삼은 거죠. 게다가 라오스인이 아닌 태국인 코치가 라오스 대표팀을 이끄는 것은 라오스를 과소평가하는 시각이라며 비난했죠.

결국 이 영화는 개봉 직전에 “라오스”라는 이름을 영화에서 모두 빼야 했습니다. 유니폼에 있던 라오스 국기가 지워졌습니다. 영화 속 라오스라는 나라는 사라지고, 대신 가상의 국가인 “아비(Arvee)”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런 편집 과정을 거쳐 <럭키 루저>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라오스 정부의 비난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제가 이 작품을 보면서, 라오스가 문제 삼은 장면들이 라오스와 라오스인을 비하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정도 표현을 문제 삼는다면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겠죠. 게다가 영화는 라오스가 아닌 태국의 경직된 사고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자국 감독이 있음에도 외국인 감독을 우선시하는 태국 축구 협회의 사대주의를 은근히 비꼬고 있죠.

오히려 라오스는 이 영화를 통해 자국을 훌륭하게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봅니다. 조금 엉뚱하고 엽기적이지만, 영화 속의 선수들은 누구보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불탑니다. 태국과의 마지막 경기 때, 조국의 국가와 자기가 맡은 팀의 국가를 모두 부르는 태국인 감독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만일 영화 속 나라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아비”라는 이름이 아닌, “라오스”였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이 영화를 보는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은 라오스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라오스의 경직된 사고가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이 영화 속에는 “라오스”를 대신해 “아비”라는 나라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줄거리 소개에도 “아비”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비가 라오스를 모델로 한 국가라는 사실은 알고 영화를 즐기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되겠죠.

이웃 나라 감독이 된 태국의 스타

퐁(Pong)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유일한 태국인 감독입니다. 그의 꿈은 조국 태국을 맡아 월드컵에 나가 잉글랜드와 겨뤄보는 것이지요. 2005년, 마침내 기회가 찾아옵니다. 태국 축구 협회는 2006 독일 월드컵 진출을 위해 퐁을 대표팀 감독에 앉힐 계획을 세웁니다. 이에 퐁은 잉글랜드 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태국 축구 협회는 브라질 감독을 선임합니다. 잉글랜드에서의 부와 명예를 버리고 태국으로 돌아온 퐁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됩니다. 허탈과 분노에 가득 차 있던 퐁. 하지만 그에게 뜻밖의 제의가 옵니다.

바로 태국의 이웃 나라인 아비(Arvee)에서 감독 자리를 제안한 것이죠. 원래 아비는 아시아의 최약체로 월드컵 2차 예선에서 탈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진출팀에 문제가 생겨 아비가 대신 3차 예선 진출권을 따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아비 팀을 럭키 루저(lucky loser)라고 부릅니다. 행운의 진출권을 딴 패자를 일컫는 말이지요.

달리 선택권이 없는 퐁은 아비의 감독으로 부임합니다. 월드컵 3차 예선에서 북한, 우즈벡 등과 한 조에 속한 아비. 여기서 선두를 차지해야 한국, 일본, 이란 등의 강팀이 즐비한 최종 예선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 대표팀의 상황은 최악에 가깝습니다. 대개가 아마추어인 선수들은 투쟁심도 없고 제대로 된 훈련도 받아본 적이 없죠. 그러나 퐁은 좌절하지 않고 과학적인 훈련 방식을 도입합니다. 전문 피지컬 트레이너를 고용하고, 컴퓨터 분석 등을 통해 체계적인 훈련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새로운 인재들이 모여듭니다. 태국에서 축구를 배운 미드필더 상렉(Sanglek)이 전술의 핵이 됩니다. 길거리에서 수박을 던지던 과일 장수는 골키퍼로, 사냥개를 쫓는 개장수가 윙으로, 산에서 도술을 닦던 이가 공격수에 합류합니다. 아비 대표팀은 우즈벡의 백인 선수들에게 위축되지 않기 위해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하는가 하면, 북한의 추위에 적응하기 위해 냉동고에 들어가는 엽기적인 훈련도 서슴지 않습니다.

퐁의 이런 노력들은 결실을 맺습니다. 아비는 사상 최초로 최종예선에 진출합니다. 그러나 최종 예선 같은 조에 속한 일본, 이란은 너무 강했고, 결국 아비는 조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합니다. 플레이오프 상대는 다른 조 3위인 태국. 바로 퐁의 조국이죠. 브라질 감독이 이끄는 태국과 플레이오프를 펼쳐 이기는 팀이 독일로 가는 마지막 티켓을 놓고 북중미 4위 팀과 겨루게 됩니다. 퐁은 예전부터 동경하고 사랑했던 태국 팀을 향해 칼끝을 겨눠야 하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과연 아비는 태국을 꺾고 아시아-북중미 승자 결정전을 거쳐 독일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을까요?

과연 동남아 팀을 월드컵에서 볼 수 있을까?

아비(라오스)가 태국을 꺾고 독일 월드컵에 진출한다니! 사실 최종 예선에 올라오는 것조차 힘든 게 동남아의 현실임을 감안하면 영화 속 내용은 좀 허무한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동남아 국가들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적은 아직 없죠.

그래서일까요? <럭키 루저>속에는 월드컵으로 대표되는 세계 무대를 동경하는 동남아 사람들의 심리가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주인공 퐁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감독을 맡는다는 설정이 그렇습니다. 우리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우즈벡이나 북한 같은 팀이 아비에게는 무시무시한 강팀으로 묘사되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면, 백인들에 대한 심리적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심리도 그렇습니다. 미스 아비(Miss Arvee)가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미스 베네수엘라를 꺾고 세계 최고의 미녀에 선출되는 장면도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아시아를 나와 전세계와 겨루고 싶지만, 아직 그럴 능력이 안 되는 동남아 축구의 아쉬움이 영화에는 짙게 배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1986 멕시코 월드컵 무대에 오랜만에 진출했을 때, 선수들은 유럽과 남미의 강팀들에게 주눅이 들어 제대로 된 경기를 펼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94 미국 월드컵의 선전으로 그런 심리적 위축이 줄어드나 싶었지만 4년 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게 0:5로 대패하면서 한국 축구의 패배 의식은 도리어 더 깊어졌죠.

우리를 대파했던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고, 홈 그라운드의 장점을 살린 2002 월드컵이 되어서야, 우리는 유럽 혹은 남미에 가졌던 위축감을 간신히 벗어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독일 월드컵에서 첫 원정 승리를 거두고, 유럽 한복판에서 프랑스와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게 되죠. 이제 옛날 같은 패배 의식과 위축감은 우리 대표팀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처럼 월드컵에 진출하는 것만큼이나, 축구 강국을 상대로 자신감을 가지는 것 자체는 힘든 일입니다. 단순히 뛰어난 감독을 영입하는 것만으로는 안되죠. 실전 경험과 시행착오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이 영화, <럭키 루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독일 월드컵에 진출한 아비는, 프랑스, 멕시코, 카메룬에게 소나기 골을 얻어맞으며 3패로 탈락합니다. 이런 게 바로 세계 무대의 신고식이겠죠. 동남아 축구팬들도 분명 알고 있을 것입니다. 월드컵에 진출하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선에 진출해 대패라도 당해보고 싶은 게 태국 혹은 라오스 축구팬들의 마음 아닐까요? 그런 그들의 간절함과 동경심이 이 영화, <럭키 루저>에 잘 담겨 있습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헤럴드스포츠>에서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1(2014년 08월 ~ 2015년 08월)을 연재했고 이어서 시즌2를 연재 중이다. 시즌1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를 재구성했고, 시즌2는 책에 수록되지 않은 새로운 작품들을 담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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