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 (4) 우승하면 우리 팀은 사라지는 거야? - 오프사이드 반칙
<헤럴드스포츠>가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를 연재합니다. 앞서 연재된 시즌1이 기존에 출판된 단행본 '킥 더 무비'를 재구성한 것이라면 시즌2는 새로운 작품을 대상으로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이미지중앙

영화 '오프사이드 반칙'의 포스터.



터키 축구 문화를 영화로 만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 중, 터키만큼 독특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또 있을까요? 아시아와 유럽,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권 사이에 끼어서 양측 모두와 활발한 교류와 전쟁을 한 나라가 터키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베네치아, 스페인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국가와 전쟁을 치르고, 제국주의 시대에도 오스만 제국의 이름으로 유럽 열강과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오늘날은 그런 과거의 영화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터키. 유럽 연합에 들어가고 싶어도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서는 터키를 유럽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정교분리와 세속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터키의 문화는 다른 이슬람 국가와도 다르죠. 술도 마시고 여성이 히잡(hijab)이라 불리는 머리 스카프를 강제적으로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다른 유럽 연합 국가와 동일한 자동차 번호판을 쓰지만, 정작 유럽 문화권에서는 은근히 배척당하는 나라가 터키입니다. 한때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다가, 지금은 터키의 대도시로 성장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은 그런 터키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예전에 제 친구가 미국 유학을 갔을 때, 각국에서 온 학생들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토론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터키는 과연 유럽인가, 아시아인가?”라는 주제가 주어졌고, 수많은 나라의 학생들이 논쟁을 벌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제 친구의 한마디에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터키를 유럽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하네요. 친구가 한 말은 바로 “터키는 유럽이다. 유로 2008에서 터키가 활약하는 거 다 보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비록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터키가 유럽인지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있지만, 축구에서만큼은 터키는 당당한 유럽 축구 연맹(UEFA)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단순히 소속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터키는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1999~2000 UEFA컵 결승전에서 아스널을 꺾고 터키의 명문 갈라타사라이(Galatasaray)가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유로 2008에서 매번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4강에 진출해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실 터키 축구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습니다. 1875년 영국인들에 의해 오스만 제국에 도입된 근대 축구는 이스탄불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외국인 선수들만 인정이 되어, 터키 사람들이 축구를 하면 경찰에 연행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갈라타사라이, 페네르바체(Fenerbahce) 등의 명문팀들을 중심으로 치열한 리그가 펼쳐지고 있죠.

그렇다면 이런 터키 축구 문화를 담은 영화는 없을까요? 여기 있습니다. 바로 <오프사이드 반칙>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도시의 유명팀을 다룬 작품은 아닙니다. 프로 승격을 노리는 터키 시골 마을의 아마추어 팀의 여정을 통해, 축구 문화가 얼마나 터키 전통에 깊숙이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죠.

프로 승격을 노리는 시골 팀, 하지만 우승 뒤에 기다리는 건?

때는 1982년, 터키 부르사(Bursa) 주변의 어느 시골 마을에는 에스납 스포르(Esnaf Spor, 이하 에스납)이라는 아마추어 축구팀이 있습니다. 클럽 하우스가 없어 팀의 이사인 함디(Hamdi)의 빵집을 사무실로 쓰고, 잔디도 깔려 있지 않은 흙 바닥 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쓰고 있죠. 제대로 된 세탁 설비도 없어 선수들은 때묻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섭니다.

주인공 수앗(Suat)은 40살이 다 되어가는 노총각입니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포목점에서 일하면서, 에스납의 골키퍼로 활약 중이죠. 그런 수앗도 사랑하는 여성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여동생의 친구인 누르텐(Nurten)입니다. 수줍음이 많은 수앗은 동네 꼬마인 무스타파(Mustafa)를 시켜 누르텐에게 연애 편지를 계속 보내지만, 어찌 된 일인지 누르텐은 좋다 싫다 아무런 반응조차 없습니다.

어느 날, 에스납에는 잘 생기고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센터포드가 입단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세르칸(Serkan)이죠. 수앗은 왠지 세르칸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 하지(Haci)의 뜻을 따라 열심히 연습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에스납에 검은 그림자가 덮치기 시작합니다. 터키 정부는 하부 리그의 활성화를 위해 지역 아마추어 리그를 프로화하기로 결정합니다. 만일 에스납이 이번 시즌 우승을 차지한다면, 새로 시작되는 프로 하부리그에 참여할 수 있게 되죠.

하지만 프로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선수 전원이 프로여야 하고, 최신식 잔디 구장이 필요합니다. 이에 지역의 부자들이 아스납에 투자의 손길을 뻗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운영되던 에스납의 운영권은 마을 빵집 주인인 함디에게서 지역 은행으로 넘어가죠. 만일 아스납이 우승한다면, 팀은 프로로 승격합니다. 그러나 선수들은 모두 프로 선수로 대체되고, 팀의 상징 색을 비롯한 많은 전통들이 바뀔 예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어떤 의미일지, 다들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우승을 해도 정작 자신들은 내년에 프로에서 뛸 수 없음을 알게 된 에스납의 아마추어 선수들. 설상가상으로 팀의 정신적 지주인 감독 하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게다가 수앗이 사랑하던 누르텐이 세르칸과 결혼하면서, 수앗과 세르칸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과연 에스납은 우승을 할 수 있을까요? 우승하게 되면 여지껏 에스납을 위해 뛰었던 선수들은 어떻게 될까요? 수앗은 누르텐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혹시 축구가 터키의 전통 스포츠인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 정도더군요. 우리가 흔히 아는 축구의 화려한 모습은 여기서 보이지 않습니다. 스타 플레이어와 거대한 경기장, 광고와 스폰서 같은 건 터키 시골의 에스납에겐 어울리지 않죠.

오히려 우리가 제 3 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각국의 민속 놀이처럼 축구는 터키 사람들의 일상에 진하게 녹아 있습니다.

터키 시골의 노인정에서 할아버지들은 담배를 피우며 새로 오는 스트라이커 세르칸의 몸값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칩니다. 유명한 터키의 스파에서 선수들은 수건 한 장을 두르고 전술토의를 하죠. 경기가 있는 날, 유목 민족의 전통에 따라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손가락에 묻히며 승리를 기원합니다. 구단 이사진은 터키의 전통차인 차이(cay)를 계속 홀짝거리며 구단의 운명을 논하죠. 심지어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은행가와 자본가들조차 소박한 가옥에서 터키 전통 바비큐를 먹으며 구단 매입을 토론합니다.

이처럼 에스납에서 축구는 터키의 전통 스포츠가 되고, 유목 민족의 토착 문화와 결합합니다. 그러나, “프로화”의 바람이 몰아치면서 이런 에스납의 소박한 축구 문화도 도전을 받게 되죠. 아마추어 리그에서 우승을 하더라도 그 멤버들은 다음 해의 프로 무대에서 뛸 수 없습니다. 다른 직업을 갖지 않은 채, 온전히 프로 선수로 등록된 사람만이 선수로 뛸 수 있죠. 흙바닥에 잔디가 심기고, 높은 관중석이 올라갑니다. 마을의 이름을 단 축구팀은 계속 활동하겠지만, 과연 선수와 전통이 바뀌어버린 팀을 내 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프사이드 반칙>은 프로화와 상업화의 물결로 인해, 초창기 클럽 축구의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세태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습니다. 터키뿐 아니라, 유럽과 남미에서 1800년대 후반의 초창기 축구는 친목 모임에 가까웠습니다. 철도회사나 항만의 노동자들이 만든 클럽, 부유층의 자제들이 사교 목적에서 만든 클럽, 동네 술집(펍) 주인이 자기 가게 공터에 만든 축구장 등등. 이처럼 ‘사람’과 ‘인간관계’가 중심이 되던 초창기 축구는, 이제 돈과 규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지 오래입니다.

물론 승강제가 정착되고, 하부 리그의 팀들에게 기회가 돌아간다는 프로화의 장점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지역 주민들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축구 클럽의 프로화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영화에 드리워진 터키-아르메니아 분쟁

<오프사이드 반칙>에는 터키의 순수한 시골 축구 문화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의 어두운 면도 담겨 있는데, 바로 터키-아르메니아 분쟁입니다. 서로 이웃인 두 나라는 현재 국경을 폐쇄하고 모든 교류를 중단한 상태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으로 아르메니안 정교를 믿는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낀 위치로 인해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죠. 그래서 고대 페르시아 제국부터 시작해 몽골과 오스만 제국, 최근까지는 소련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오늘날의 터키인 오스만 제국은 제 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에 우호적인 아르메니아 인들은 탄압하기 위해 수많은 아르메니아 인들을 죽였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주장으로는 150만 명이, 터키의 주장으로는 30만 명이 오스만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연히 터키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원한은 하늘을 찌릅니다. 게다가 구소련이 몰락하면서 1992년경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영토 갈등이 전쟁으로 번졌는데,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르메니아와 터키 간의 해묵은 갈등이 다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이러한 두 나라의 갈등이 어렴풋이 나타납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터키의 조그만 시골 마을에도 아르메니아 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지만 상대방이 아르메니아 사람이라는 걸 알면 갑자기 말을 잃고 어색해 하지요. 게다가 죽은 사람을 이슬람 율법에 따라 장례식을 치렀는데, 알고 보니 기독교인인 아르메니아 인인 경우도 영화에 나옵니다.

하지만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에 화해의 분위기가 찾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것도 축구를 통해서였지요.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전 때, 같은 조에 속한 터키와 아르메니아. 2008년 9월 아르메니아 수도인 예레반에서 열린 두 나라의 경기 때 터키 대통령이 아르메니아를 전격 방문했습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다음 해 터키 홈경기 때는 아르메니아 대통령이 터키의 부르사(이 영화의 배경이 된 지역)를 방문하죠. 사람들은 이를 두고 과거 미국과 중국의 “핑퐁 외교”를 본떠 “축구 외교”라 부릅니다.

이처럼 애증의 실타래를 갖고 있는 양국 관계는 축구를 다룬 영화 <오프사이드 반칙>에도 등장합니다. 감독은 사라져가는 터키의 토착 축구 문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으면서도,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웃 나라와의 화해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헤럴드스포츠>에서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1(2014년 08월 ~ 2015년 08월)을 연재했고 이어서 시즌2를 연재 중이다. 시즌1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를 재구성했고, 시즌2는 책에 수록되지 않은 새로운 작품들을 담았다.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