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흥겨운 인도 발리우드 축구 영화 - 이준석의 킥 더 무비<단 다나 단 골>
춤과 노래 그리고 축구

엄밀히 말하면 <슈팅 라이크 베컴>은 인도 발리우드 전통에 충실한 영화는 아닙니다. ‘발리우드(Bollywood)’라는 말은 인도 최대의 도시이자 영화산업 중심지인 뭄바이(Mumbai)의 옛 이름인 봄베이(Bombay)와 할리우드(Hollywood)의 합성어입니다. 인구가 많고, TV 보급률이 낮았던 과거의 인도에서 영화산업은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고 합니다.

이런 인도 영화의 특징으로는 러닝타임이 3시간에 가까울 정도로 길고, 중간 중간 뮤지컬처럼 주인공들이 단체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이지요.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인도 영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 후진적인 이미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도 빈민가의 현실을 다룬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가 아카데미상을 받고, 인도 최고 공대생들의 삶을 다룬 <세 얼간이(Three idiot)>가 인기를 끌면서 인도 영화의 작품성과 오락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화면이나 이야기 구성 등에서 발리우드 영화는 할리우드나 우리 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축구 영화는 어떨까요? 발리우드 영화의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클럽 축구를 훌륭하게 그려낸 작품이 있습니다. 2007년에 개봉한 <단 다나 단 골(Dhan Dhana Dhan Goal)>이라는 영화입니다. <슈팅 라이크 베컴>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에 이주해 살고 있는 인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에서 인도인 여주인공은 축구를 통해 여성을 차별하는 인도의 뿌리 깊은 악습에 맞서 싸웠죠. <단 다나 단 골>에서는 영국 땅에서 인도인들이 겪는 인종차별과 정체성의 혼돈을 정면으로 풀어냅니다.

이미지중앙
너희들 스스로 축구선수라 칭하지 않았던가?


잉글랜드의 어느 소도시에는 사우스홀 유나이티드(Southall Utd. 이하 사우스홀)라는 축구팀이 있습니다. 9부 리그 정도에서 뛰는 별 볼 일 없는 아마추어 팀이죠. 특이한 건 사우스홀의 선수들은 전원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같은 남아시아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관중석도 별로 없는 공터나 다름없는 운동장을 사용하는 이들이지만, 그래도 주변인들과 경기장에서 파티도 하고 술도 먹고 하면서 재미있게 지내고 있죠.

하지만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사우스홀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경기장의 토지 임대 기간이 끝나면서 시의회는 사우스홀 경기장을 복합 쇼핑몰로 개발하려 합니다. 300만 파운드(한화 약 30억 원)의 임대료를 지급하지 않으면 사우스홀은 경기장을 뺏길 위기에 처합니다.

사우스홀의 주장인 샨(Shaan)은 좌절에 빠집니다. 사실 사우스홀은 비록 성적은 부진해도 수십 년 전부터 잉글랜드 내 인도인들의 자부심을 지켜주던 전통 있는 축구팀이었지요.

그런 사우스홀이 딱 한 번 우승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1985년, 팀의 전설적인 선수인 토니(Tony)가 뛰던 때였지요. 하지만 토니는 결승전 당일 갑작스레 종적을 감추고 결국 사우스홀은 우승의 기회를 날려 버립니다.

샨은 이제는 중년이 된 토니를 찾아가 감독직을 부탁합니다. 처음에 거절하던 토니는 결국 감독직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놀라는 깜짝 영입을 하지요.

써니(Sunny)는 명문 아스톤(Aston)에서 뛰고 있는 인도인 이민 2세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인도를 가 본 적이 없는 써니는 스스로를 영국인이라고 생각하며, 나중에 귀화를 통해 영국 대표팀에 뛰는 꿈을 키웁니다. 아버지는 그런 써니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인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이라고는 없는 써니를 아버지는 남처럼 대합니다. 게다가 써니는 남아시아 출신만으로 구성된 사우스홀을 툭하면 무시하고 경멸하지요. 샨 역시도 이런 써니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탄탄대로인 것만 같던 써니의 축구 인생이 틀어집니다. 써니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음에도 인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스톤의 주전경쟁에서 밀립니다. 좌절한 써니를 찾아온 사우스홀의 새 감독 토니. 토니는 샨을 비롯한 사우스홀 선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써니를 영입합니다.

역시나 써니와 샨은 모든 문제에서 티격태격합니다. 다른 동료들도 자신들을 무시해 온 써니와 충돌하죠. 마침내 리그는 개막했지만 불화에 쌓인 사우
스홀은 연패의 수렁에 빠집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감독 토니는 선수들을 데리고 명문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으로 향합니다. 최고의 팀의 라커룸을 보여주면서 토니는 선수들에게 소리치죠.

“너희들 스스로 축구선수라 칭하지 않았던가?”

축구 이야기가 아니야. 이건 우리가 누구인지, 이 나라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 우리 부모와 우리 아이들… 그리고 네가 팔아버린 우리 정체성에 대한 문제라고! 이것은 우리의 피부색, 자부심, 유산, 이름, 그리고 자존심에 대한 문제야! - 샨(Shaan)

토니의 꾸지람에 정신을 차린 사우스홀 선수들. 게다가 아스톤 원정 경기에서 써니의 이전 동료들이 써니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본 사우스홀의 동료들은 같이 분개합니다. 그리고 써니의 아픔을 이해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죠. 이후로 사우스홀은 연전연승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리그 선두에까지 오른 사우스홀. 그러나 어두운 음모가 이들을 덮칩니다.

이미 축구장 개발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한 시의회는 사우스홀의 우승을 막기 위해 써니에게 접근합니다. 써니에게 고액의 연봉과 옵션을 제시하며 사우스홀을 떠나 밀월(Millwall)로 이적할 것을 제의합니다. 하부 리그만 전전하던 써니는 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결국 중요한 게임들을 앞두고 써니는 밀월과의 계약에 서명합니다.

샨은 이 소식을 듣고 써니에게 소리칩니다. 그저 축구에서 늘 일어나는 이적일 뿐이라고 말하는 써니. 그러나 샨은 사우스홀이 잉글랜드 내 인도인들을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단순한 축구가 아닌, 정체성과 자부심의 문제라고 말이죠.

다들 이해를 못하는 거야. 만일 네 형이 루니와 뛸 기회를 얻는다면 어떻게 할 것 같니? - 써니

당신이 나에겐 루니에요. - 샨의 어린 남동생

써니의 갑작스런 이적에 당황함과 분노를 느낀 동료들. 그들은 써니를 배신자로 규정합니다. 인도인 이민자 사회도 써니를 배척합니다. 고립된 써니. 그는 자신을 찾아온 샨의 어린 남동생 꼬마에게 위와 같이 말합니다. 하지만 샨의 남동생은 써니가 자신의 영웅이었다며 실망감을 내비치죠.
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스트라이커 써니를 잃은 사우스홀.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경기에서 아스톤을 반드시 이겨야 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필드에서 90분을 뛰는 동안, 너희들은 단 2~4분 정도만 공을 갖고 있게 된다. 지단이든 마라도나든 펠레든 베컴이든 그 4분간만 자기 경기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 4분이 너희들의 축구가 되는 거야. 그게 진실이다. - 감독 토니(Tony)

아스톤과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감독 토니는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밝힙니다. 과연 사우스홀과 샨은 리그 우승을 일구어내고, 경기장을 지킬 수 있을
까요? 써니는 영국인과 인도인 중에 어느 길을 택하게 될까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잉글랜드

잉글랜드, 아니 영국은 한때 전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의 이민자들이 많죠. 영국에 다녀와 본 사람들은 유럽 중에서도 영국이 가장 아시아인에 대한 입국이 까다로운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아직도 아시아를 식민지로 생각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나라에서 창안한 축구라는 스포츠가 오늘날 전 세계를 열광시킨다는 점은 꽤 역설적입니다.

<단 다나 단 골>에서는 여러 가지 인종적 갈등이 나타납니다. 심지어 사우스홀 내에서도 인도인들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서로를 비난하며 다툽니다. 같은 인도인 내에서도 터번을 쓴 펀자브 출신의 시크 교도를 향해 독설을 날리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써니를 통해 결국 백인들이 자신들의 피부색을 근거로 도매금으로 비웃고 각종 차별을 하는 세태를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사람의 후천적 능력과 인품이 아닌, 선천적이고 무작위적인 피부색으로 그를 평가하고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느끼게 되지요. 이 영화에서는 이처럼 이국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의 문화와 자부심을 상징하는 존재로 축구팀이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세계의 많은 축구팀들은 이런 이민자 사회에서 성장하곤 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명문팀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는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셀틱(Celtic FC)은 아일랜드계 이민자들과 관련이 깊지요. 이민자 사회에서 시작한 팀은 아니지만 수원에도 중국 대표팀 수비수인 리웨이펑이 뛰자 많은 중국인 유학생들이 빅버드 스타디움을 찾기 시작했고요.

이에 대해서 『축구란 무엇인가?』의 크리스토퍼 바우젠바인을 비롯한 많은 축구학자들은 축구 클럽이 고향을 떠나 도시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고향의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시골의 공동체 생활이 사라지고 마을 예배당 같은 종교적 구심점도 뚜렷하지 않은 산업화된 도시. 여기서 사람들은 자기 도시를, 혹은 자기 구역을 대표하는 축구 클럽에 소속감을 느끼게 되고, 주말마다 벌어지는 경기는 종교적 행사와 만남의 장을 겸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는 이민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겁니다. 게다가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에서는 외부로부터 이들을 지켜주는 장벽의 역할도 겸하게 되겠지요.

단 다나 단 골. 이 말은 힌두어로 ‘골 그리고 또 골’이라고 합니다. 영화 내내 울려 퍼지는 ‘단 다나 다나 단 다나 다나 골’이란 흥겨운 후렴구와 함께 축구선수들이 신나게 춤을 추는 발리우드 영화. 서구에서 발명된 영화를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소화하는 인도의 모습은 자신을 지배했던 영국의 스포츠를 이용해 오히려 인도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등장인물들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하네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