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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잉글랜드는 무조건 져야 돼! - 이준석의 킥 더 무비<식스티 식스>
식스티 식스(Sixty Six)

<베른의 기적>에서는 2차 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인 독일의 한 가정이 어떻게 전후 사회를 살아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승전국인 영국은 어땠을까요? 전쟁에 패한 독일도 라인 강의 기적을 바탕으로 경제 부흥을 이뤄냈으니 전쟁에 이긴 영국의 상황은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2차 대전의 승패가 곧 그 나라들의 미래로 직결되지는 않았습니다. 2차 대전 중, 독일과 소련 간의 전쟁을 다룬 책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는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전쟁에 이긴 소련 국민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그 미래는 패전국 독일과 일본의 것이었다. 독일과 일본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는 동안 소련 국민들은 오히려 공산 독재로 인해 삶이 곤궁해졌다.”

영국의 사정도 낫지 않았습니다. 전쟁 전만 하더라도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경영하며 눈부신 영화를 누리던 영국. 하지만 전쟁 이후 식민지들이 줄줄이 독립해 나가고, 세계 경제의 축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태평양으로 옮겨가면서 경제 사정이 악화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업률은 올라가고 각종 사회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축구장에 극우 세력과 훌리건들이 등장하는 것도 이때쯤입니다.

과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지만 이제 점차 저무는 해를 바라만 봐야 하는 영국. 그래도 그들이 한때나마 세계를 지배했던 시절을 다시 추억하며 잠깐의 향수에 젖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이었죠. 참고로 영국은 FIFA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의 4개국으로 따로 가입되는 특전을 누렸기에 월드컵도 영국이 아닌 잉글랜드의 이름으로 개최했습니다. 자연스레 잉글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지역은 종주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임에도 지역예선에 참가해야 했고 모두 탈락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경제 불황과 사회 문제로 골치를 앓던 영국이었지만 잉글랜드 월드컵은 당시로서는 가장 성공한 대회로 기록되었습니다. 축구 종주국답게 처음으로 100만 관중을 돌파했고, 최초로 TV 중계가 도입되었습니다. TV로 잉글랜드 월드컵을 처음 본 미국인들이 축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정도니 그 파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죠.

최고의 수확은 잉글랜드가 최초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종주국의 자존심 때문에 프랑스가 주도한 FIFA 월드컵을 보이콧하기도 했던 영국. 하지만 나날이 커지는 월드컵의 영향력 때문에 영연방 4개국 개별 출전이라는 명분으로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처음 출전했었죠. 하지만 잉글랜드는 아마추어로 구성된 미국에 0:1로 패하는 망신을 당합니다. 이후로도 신통한 성적을 못 내죠.

그런 상황에서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종주국 국민들에겐 무한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죠. 이번에 살펴볼 영화도 당시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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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우승을 저주하는 영국 소년


버니(Bernie Rubens)는 영국 런던에 살고 있는 초등학생 꼬마입니다. 버니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습니다. 특별한 재능도 없는데다 싸움도 못해서 언제나 다른 애들의 동네북 신세입니다. 게다가 가족 내에서도 형인 알비(Alvie)에 밀려 기를 못 펴고 있죠.

버니의 가정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런던에 정착한 유태인으로서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는 버니의 집안. 하지만 버니의 아버지인 매니(Manny)는 결벽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먼지와 얼룩을 싫어해서 가구들에 비닐을 씌워놓고, 식사할 때는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속옷 차림으로 식탁에 앉습니다. 사고가 날까봐 언제나 시속 40km로만 운전을 해서 교통 정체를 일으키죠. 알비에게 시달리는 버니처럼 아버지인 매니도 형 지미(Jimmy)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머 감각 넘치고 풍채가 좋은 지미에 비해 버니의 아버지 매니는 괴팍한 이미지입니다.

그래도 버니에겐 삶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는 1966년 7월 30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죠. 바로 13번째 생일이자 유대교 성인식(Bar Mitzvah)이 있는 날입니다. 유태인들에게 성인식은 진정한 남자가 되는 날입니다. 호텔의 넓은 홀을 빌려서 성대한 축하파티를 합니다. 그리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선물과 축의금을 주죠. 형 알비의 성인식도 그랬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버니는 성인식 날, 자기가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버니와 가족에게 검은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버니네 집이 운영하는 식료품 근처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매상이 뚝 떨어집니다. 버니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버니의 성인식 규모를 줄이려 하죠. 화려한 성인식을 꿈꿨던 버니. 하지만 아버지 매니는 버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거기에 더 큰 난관이 생깁니다. 1966년 7월 30일, 이 날은 버니의 성인식이 열리는 날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벤트가 있죠. 바로 잉글랜드 월드컵의 결승전이 있는 날입니다. 만일 잉글랜드가 결승전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아무도 버니의 성인식에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날짜를 바꾸고 싶지만 성인식 날
짜를 옮기는 것은 유대교에서는 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결국 버니는 잉글랜드 대표팀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버니의 성인식이 성대하게 열리기 위해선 잉글랜드가 결승전에 올라가면 안 되죠. 잉글랜드 대표선수들의 사진에 저주의 주문을 외우고, 상대팀을 응원하기 시작한 버니.

하지만 잉글랜드팀은 버니를 비웃기라도 하듯 파죽지세로 준결승에 진출합니다. 상대는 당대 최고의 스타 에우제비오(Eusebio)가 버티는 포르투갈. 당연히 포르투갈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잉글랜드가 이겨버립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유니언 잭을 흔들며 환호하기 시작합니다.

잉글랜드가 결승에 진출하자 버니의 성인식에 오기로 했던 사람들이 갖은 핑계를 대며 약속을 취소하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승리의 기쁨에 취한 사람들이 쏜 폭죽에 버니네 집 천장이 불에 타고, 거기 숨겨 둔 매니의 비상금도 홀랑 타 버립니다.

이제 버니네 집은 버니의 성인식을 치를 돈도, 의욕도 사라져 버립니다. 낙담한 아버지 매니는 여전히 근심에 쌓여 있습니다. 그렇게 1966년 월드컵 결승전, 아니 버니의 성인식은 다가옵니다.

버니는 과연 성인식을 웅대하게 치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버니의 아버지 매니는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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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유산

<베른의 기적>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자막이 나옵니다. “스위스 월드컵 우승 이후 라인 강의 기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이런 기적이나 번영은 없었죠.

버니와 아버지 매니의 모습은 2차 대전 이후 실의에 빠진 영국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전쟁만 끝나면 지금보다도 더 나은 삶이 펼쳐질 거라고 믿으며 많은 영국인들은 독일의 공습을 견뎌내고 끔찍한 전쟁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패전국들이 눈부신 성장을 하는 동안 영국은 오히려 불황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대표팀이 패전국의 굴레를 벗어나 승승장구하지만 종주국인 잉글랜드팀은 망신만 당하며 국민들의 자존심을 구깁니다. 화려한 성인식을 기대했지만 갈수록 기대를 낮춰야 하는 버니. 그리고 식료품 사업의 번영을 꿈꿨으나 온갖 악재를 견뎌야 하는 아버지 매니. 2차 대전 승리가 빛바랜 영광이 되었듯 버니 가족에게 월드컵도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실패하고 의미 없는 것일까요? 영국의 승전 역시 소득 없는 희생이었을까요?

성인식이 무산될 위기에 쳐하자 실의에 빠져 있는 버니에게 유대교 랍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인식은 선물을 받는 파티가 아니다. 그건 네가 책임감 있는 성인이 되었단 말이다.”

1966 월드컵의 우승은 잉글랜드가 차지했습니다. 종주국임에도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여 조롱받던 잉글랜드팀. 그들은 브라질, 포르투갈, 프랑스, 독
일 같은 나라에 밀려 우승후보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롱을 이겨내고 보란 듯이 우승을 차지했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버니와 아버지 매니는 같이 웸블리 경기장으로 결승전을 보러 갑니다. 그리고 버니는 아버지 역시 완벽하지 않고, 많은 고민과 시련을 겪으며 사는 한 인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매니도 버니가 나름의 희망과 고민을 안고 사는 존재임을 느끼게 되죠. 시련은 이렇게 가족 구성원들을 서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성인식의 의미는 선물과 파티 같은 물질적인 데 있는 게 아니라고 한 유대인 랍비의 말. 종전 후 잘 나가는 패전국들을 보며 실의에 빠진 영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승전국 소련의 국민들이 부러워했던 패전국 일본의 경제 번영을 봐도 그렇습니다. 전범국임에도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룬 일본. 하지만 전쟁을 통해 배운 게 없다 보니 지금도 우익 정치인들의 과거사 왜곡과 망언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높은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리더국가가 되지 못하고 있죠.

처칠은 유럽을 장악한 독일이 폭격기를 동원해서 사정없이 폭탄을 쏟아 붓는 와중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 될 것이다.”

즉, 전쟁과 시련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물질적인 전리품이나 보상금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이 성숙해지고, 가족과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는 게 바로 전쟁의 성과임을 처칠은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 영화 <식스티 식스>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이, 월드컵이, 그리고 사업의 실패와 초라한 성인식이 재앙이 아닌 발전의 계기가 되었음을 말이죠.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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