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우리 독일은 지지 않았어 - 이준석의 킥 더 무비<베른의 기적>

2차 대전 종전, 그리고 아버지들

2차 대전은 전 세계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강대국들의 위치가 바뀌었고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을 했죠. 축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중단된 유럽 리그와 월드컵. 하지만 전쟁 이후 오히려 경제 부흥이 오면서 축구 산업은 팽창해 왔죠.

축구에 열광하는 나라 중 2차 대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곳은 독일과 영국입니다. 실제로 종전 이후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영국과 독일의 악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은 듯합니다.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에는 축구를 매개로 한 양국의 악감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잉글랜드와 독일의 축구 경기가 다가오면 잉글랜드의 신문에는 과거 독일 나치당의 만행을 꼬집는 기사가 나옵니다. 영국 사람들은 독일인들이 ‘상스럽게도 소시지와 양배추를 같이 먹는 민족’이라며 비웃죠(이게 왜 상스러운지 문화가 다른 우리로서는 잘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이 두 나라 사람들은 사실 비슷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고집불통에 보수적인 그들. 게다가 말수 적고 성실한 사람이 이상적인 아버지로 여겨지는 것도 비슷하지요. 프랑스 사람들은 영국, 독일인과 어울리지 못해도, 영국과 독일인들은 서로 말이 잘 통한다고 하죠. 히틀러가 2차 대전 초기에 영국과는 전쟁을 피하려 하면서 두 민족의 혈통이 비슷하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이야기까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2차 대전과 축구로 대표되는 이 두 나라의 영화들은 어떨까요? 마침 좋은 비교 대상이 있습니다. 독일 영화 <베른의 기적(Das Wunder von Bern)>과 영국 영화 <식스티 식스(Sixty Six)>가 그들입니다. 둘 다 2차 대전 이후 월드컵을 다루고 있지요. 게다가 전쟁을 겪은 아버지들과 아들의 관계에 대한 작품들입니다. 먼저 <베른의 기적>을 다루고 그 다음 <식스티 식스>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미지중앙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독일의 첫 우승


1954년 독일. 세상은 혼란스럽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독일은 2차 대전에서 패배했습니다. 에센(Essen) 지방에서 살고 있는 마테스라는 소년은 축구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리고 마테스의 영웅은 바로 축구선수 ‘란’이지요. 란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독일 대표 선수로 선발됩니다. 란은 마테스가 경기장에 있어야지만 골을 넣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지요.

한편, 2차 대전 때 소련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마테스의 아버지가 돌아옵니다. 10년이 넘는 시베리아 수용소 생활을 끝낸 마테스의 아버지는 이미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지요. 아버지는 그렇게 고생을 해서 끝내 살아 돌아왔건만 자신을 낯설어 하는 가족들에게 실망을 합니다. 그리고 더욱더 자식들에게 엄하게 대하지요. 그럴수록 마테스와 아버지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교회에서 기껏 독일 대표팀의 승리나 기도한다며 마테스를 꾸짖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화가 난 마테스는 홀로 월드컵을 보기 위해 가출을 시도하지만 결국 아버지에게 걸리고 맙니다.

스위스에서 독일 대표팀은 신통치 않은 성적을 냅니다. 지금이야 월드컵 4회 우승에 빛나는 막강 전차 군단이지만, 당시만 해도 독일 대표팀은 그리 강팀은 아니었나 보네요. 오히려 지금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헝가리 대표팀이 당시에는 강력한 우승후보였습니다. 푸스카스라는 걸출한 선수를 앞세운 헝가리 팀은 ‘무적의 마자르(헝가리 민족)’라고 불리며 유럽을 호령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독일은 예선에서 헝가리에게 참패하고도 어찌해서 결승까지 올라갑니다.

드디어 대망의 결승전. 독일은 헝가리와 다시 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습니다. 0:2로 뒤지던 독일팀은 있는 힘을 다해 2:2 동점을 만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란에게 절호의 기회가 옵니다. 그리고 란은 결승전이 열린 스위스 베른 경기장에서 믿지 못할 장면을 봅니다. 바로 그의 행운의 마스코트인 마테스가 경기장에 있었던 것이지요. 마테스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 먼 길을 차로 달려서 온 것입니다. 마테스만 있으면 골을 넣는 란. 결국 란은 기적적인 역전골을 성공시키고 독일은 최초로 월드컵에서 우승합니다.

죗값을 치른 아버지와의 화해

독일 영화 <양철북(Die Blechtrommel)>에는 북을 두드리는 소년 오스카가 나옵니다. 오스카는 나치당이 광분하고 있는 독일 한복판에서 살아가죠.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오스카의 아버지가 죽는 장면입니다. 나치당의 열렬한 지지자인 아버지가 죽는 장면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기성세대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 극단적인 장면은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독일의 각오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베른의 기적>은 조금 다른 접근법을 취합니다. <양철북>에서 위세를 떨치던 나치 독일은 패망합니다. 패전 후 독일에서는 절망감과 패배감만이 감돌고 있었지요. 게다가 동?서독으로 분단이 되면서 사회 갈등도 심해집니다. 호프집에서 축구를 보던 독일인들이 “전쟁도 졌는데, 축구도 지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독일의 절망감과 혼란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양철북>에서 나치를 열렬히 추종하던 아버지는 결국 비참하게 죽습니다. 하지만 <베른의 기적>에서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잘못된 이념에 의한 잘못된 전쟁을 수행했던 아버지가 결국 시베리아에서 힘든 수용소 생활 끝에 살아 돌아옵니다.

이미지중앙
그런 아버지를 나치당원 취급하며 범죄자로 여기는 마테스의 형. 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양철북에 나오는 것처럼 앞장서서 나치를 추종했던 사람들은 ‘죽음’으로 상징되는 응분의 심판을 받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나라와 시대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른 기성세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똑같은 죗값을 치러야 할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잘못된 이념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것도 죄라면 죄일 수 있습니다. 시베리아 형무소 생활은 그런 ‘저항하지 못했던 죄’, ‘우유부단했고, 옳은 길을 택하지 못했던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들에게 독일의 새로운 세대들은 어렵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듯하네요.

독일이 전쟁에서 이루지 못했던 세계 정복의 꿈을 축구에서 이루는 과정은 그래서 상징적입니다. 폭력적인 전쟁이 아닌, 평화적인 축구를 통해 세계를 제패했던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그리고 결승전이 열렸던 스위스 베른 경기장에는 평화로운 독일을 이끌어 갈 신세대인 마테스와 란이 서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테스가 아버지에게 같이 경기장에 들어가자고 하지만 아버지는 빙긋이 웃으며 거절합니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영국 영화 <식스티 식스>와는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폭력적인 전쟁 범죄에 대한 죗값을 치렀고, 가족과도 화해를 한 아버지. 하지만 자의에 의한 것이든 강요에 의한 것이었든 전범국의 만행에 동참했기에 ‘축구장’으로 대표되는 평화의 신세계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독일의 미래는 결국 원죄를 안고 있는 아버지 세대가 아닌 젊은이들이 이끌어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요?

반성하는 독일의 문화

오늘날 독일 축구는 세계 최강입니다. 프로축구 분데스리가가 세계 최강의 실력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최고의 관중 동원율과 튼실한 자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 대표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출전했던 모든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한 나라는 독일이 유일합니다. 혹자들은 게르만족 특유의 좋은 신체 조건이나 탄탄한 기본기 등을 그 이유로 듭니다. 하지만 저는 독일 특유의 반성하는 문화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던 독일 대표팀은 8강에서 졸전 끝에 떨어지는 망신을 당합니다. 바로 주전들의 노쇠화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0년 유럽컵에서도 세대교체에 실패하며 졸전을 펼칩니다. 하지만 독일은 이런 실패를 거울삼아 젊은 피를 수혈하고 귀화 선수를 적극 활용하며 2002 월드컵 2위, 2006 월드컵 3위, 2010 월드컵 3위, 그리고 마침내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을 하며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반성하고 대안을 찾는 독일 특유의 문화가 낳은 결과이지요.

이 영화 <베른의 기적>에서도 그러한 독일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독일의 구세대들. 하지만 그들은 죗값을 치르고 돌아와 가족들과 세상에 용서를 구합니다. 아버지 못지않게 고생을 했던 가족들. 그들은 죄를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아버지들을 용서하고, 새로운 시대를 꿈꿉니다. 이런 독일의 아픈 역사와 뼈저린 반성이 오늘날의 경제 대국과 축구 강국을 만든 것은 아닐까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