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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첫 시각장애인대회 D-1] ‘언제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사람’ 추순영의 마지막 도전
“괜찮아요. 언니! 한 번 더요. 언니!”

지난 8일 오후, SK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 지하훈련장에 낯익은 소리가 울렸다. 이 소리의 근원지는 한국 여자골볼 대표팀. 5월 10일부터 열리는 2015서울세계시각장애인경기대회를 앞두고 경기장적응 훈련 중이었다. 앳된 선수들 사이에서 가장 힘찬 모습으로 강한 공을 뿌리는 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골볼 국가대표팀 ‘16살 막내’에서 어느덧 ‘43살 왕언니’가 된 추순영이다.

■장애를 원망하던 소녀, 한국 골볼과 함께 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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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녀의 열정과 강속구는 한결같다.


어린 추순영은 ‘선머슴’이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는 아이였다. 선천성 백내장을 앓아 전방 1∼2m 앞에 놓인 큰 고정물체만 식별하는 약시였지만 활발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남자아이처럼 뛰어다니길 좋아하고 철봉과 정글짐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겼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밝지만은 않았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왜 엄마는 나를 이렇게 낳아서 나를 힘들게 하실까’라는 원망도 했었다. 간혹 자신의 화를 주체 못해 물건 집어던지고 소리를 지르며 답답한 감정을 표출했다.

1988년을 기점으로 추순영은 ‘선머슴’에서 ‘골볼 유망주’로 변신한다. 서울 장애인 올림픽 출전 선수를 발굴하기 위한 캠프가 많이 열렸고, 1986년부터 한국에 도입된 골볼도 마찬가지였다. 양 팀 세 선수가 두 눈을 아이패드와 불투명 고글로 완전히 가린 채 경기를 펼치는 골볼은 방울이 든 1.25kg 고무공을 던져 상대방 골대에 집어넣는 구기종목이다. 추순영은 처음 만난 스포츠인 골볼에 큰 매력을 느꼈다. 동시에 태어나면서 가진 불편함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눈을 뜨고 보는 세상과 눈을 완전히 가리고 펼쳐지는 세상은 또 다르더라고요. 장애등급에 상관없이 모두 공평했고 몸싸움이 없으니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어요. 공 소리를 듣고 그 위치에 몸을 던지면 수비가 되고, 내가 원하는 곳에 다양한 구질로 굴리며 공격할 수 있으니 모든 순간이 재미있었어요. 공이 들어 갈 때 축구처럼 그물에 철썩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때마다 희열도 느끼죠. 골볼을 하며 ‘남들이 하기 힘든 경험을 한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사라졌습니다. (부모님의) 아픈 심정도 이해했고요”

‘사춘기’ 추순영은 한국 골볼 1세대 선수가 되어 골볼과 함께 성장했다. 추순영은 1988년 서울 대회에 대체선수로 발탁되며 16세에 골볼 국가대표가 되었다.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금세 주전자리를 꿰찼고 한국을 6위에 올려놨다. 7년 뒤인 1995년 영국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한국을 2위로 이끌며 한국 여자골볼의 첫 자력 올림픽 진출권을 따냈다. ‘우리도 하면 된다. 희망은 있다’라는 자신감도 얻었다. 그 결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김미정, 정은선, 박인숙 등과 함께 7위(2승 1무 4패(7위)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순위는 서울 대회보다 낮았지만 준우승국 핀란드, 4위 미국을 꺾고 전 경기 4실점 이하를 기록하는 등 좋은 경기내용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선수’ 추순영도 실력면에서 발전이 있었지만 ‘소녀’ 추순영도 선수생활을 통해 사회성이 좋아지고 성격도 점차 밝아지는 등 정신적으로 성숙해졌다.

■골볼 선수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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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추순영(왼쪽)이 골볼로 세상을 알았다면, '딸' 송희채(오른쪽)는 크로스 컨트리를 통해 세상을 느낀다. 사진=선수 제공


추순영은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둠과 함께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도 만났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 장애인 역도의 전설’ 봉덕환이다. 둘의 만남은 1988년 서울대회에서 시작되었다. 추순영은 9살 연상인 봉덕환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냈지만 대회 이후 8년간 한 번의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러나 8년 뒤 애틀랜타 장애인 올림픽을 위한 소집 때 추순영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애틀랜타 올림픽을 대비한 소집일 날이었습니다. 다른 시각 장애인 선수들과 한 곳에 모여 있는데 목발 짚은 어떤 분이 걸어오셨어요. “나 기억해? 봉!”이라고 하며 먼저 말 걸어주시더라고요. 이젠 10대가 아닌 20대이라 그런지 맘 놓고 작업을 거시더라고요. (웃음) 남편은 제가 다른 장애인 선수들을 돕거나 휠체어를 밀어주는 그런 모습에 호감을 느꼈답니다. 저도 저를 많이 아껴주시기도 하고 원래 훌륭하신 분이라 좋았고요. 애틀랜타 다녀온 뒤 11월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다시 만난 게 5월이니 6개월만에 초고속으로 결혼한 거죠. 첫 아이도 허니문베이비였답니다 (웃음)”

두 부부가 공유하는 지론은 ‘할 수 있을 때 하자!’다. 추순영은 남편이 좋아하는 낚시와 역도를, 봉덕환은 부인이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서로 지원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봉덕환은 올림픽 6회 출전 중 최고 성적이 4위였기에 부인이 브라질 장애인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이번 대회에 집중 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과 응원을 보내고 있다.

장애인 스포츠 스타의 두 자녀들도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남다르다. 딸 봉현채는 유전으로 인해 시력이 좋지 않아 장애등급판정(B3)을 받았다. 그래도 부모의 운동신경을 함께 물려 받았다. 지난 2월에 열린 전국장애인동계체육대회에 서울대표로 출전해 크로스컨트리 2.5km BLINDING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단 두 선수만 출전했지만 10분 21초로 2위와 10분 이상 차이를 냈다. 초등학교 6학년임에도 나이제한이 없었기에 성인과 겨뤘고, 동일종목 남자 2위보다 26초나 빨랐던 굉장한 성적이다. 여자 크로스컨트리 5Km Classic BLINDING에서도 금메달을 따며 다관왕에 올라 평창 장애인올림픽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비장애인인 아들 봉성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마라톤을 하기도 했고 준선수급 크로스컨트리 실력도 가지고 있다. 올해 고3으로 그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특수체육학과나 체육학과 쪽으로 진로를 고민 중이다.

■멈추지 않는 도전, ‘즐런(RUN)’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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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런(즐거운 러닝)을 통해 추순영은 삶의 에너지을 얻는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함께라면 그 에너지는 두 배가 된다. 사진=선수 제공


‘골볼 국가대표’ 추순영은 2002년 이후로 볼 수 없었다. 추순영은 부산아태장애인경기대회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골든골(골볼은 12분씩 전·후반을 치른 뒤 동점이면 골든볼 방식으로 연장을 치른다)을 넣으며 대회 남·녀 동반우승과 한국여자골볼 국제대회 첫 우승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냈다. 이로 인해 체육훈장 기린장도 받았다. 하지만 6살이 된 첫째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의 양육을 위해 태극마크를 반납하고 가끔씩 전국체전만 나섰다.

추순영의 운동세포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헬스를 통해 꾸준히 체력관리를 하던 그녀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2007년부터 다양한 스포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작은 마라톤이었다. 2007년 흰 지팡이의 날(시각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지정한 10월 15일) 행사를 맞아 참가한 10km 마라톤 대회에서 덜컥 1위에 올랐다. 이후 가이드러너들의 봉사모임 해피레그(Happy leg)와 함께 다양한 마라톤대회에 나섰다. 2008년에는 세계 5대 마라톤 대회(보스턴,시카고,뉴욕,런던,베를린) 중 하나인 베를린대회에 참가해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결승선을 통과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눈 위에서 하는 마라톤인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해 3Km Free BLINDING 부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타는 탠덤사이클도 시작하며 2012,2013 전국체전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수영실력을 늘려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하고, 사하라사막마라톤에 참가하고 싶다는 큰 꿈도 꾸고 있다.

그녀가 많은 종목에 도전하는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운동이 좋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즐런’이라는 단어는 그녀의 마라톤 신조다. “운동이 좋고 재미있어요. 마라톤 할 때 서로 복돋아주고 응원하는 분위기, 다 함께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전 뛸 때 모든 체력을 100% 쓰지 않으려 합니다. 선수도 아닌데 숨이 넘어가도록 뛰면 즐겁지도 않고 몸에 과부하가 걸리기 때문이죠. 풀코스를 뛰더라도 내 몸을 추스릴 수 있는 체력은 남기려합니다. 그래서 즐런 즉. 즐거운 러닝을 추구해요"

■장애인 올림픽 출전권을 위해 13년 만에 고글 착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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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순영은 한국 골볼과 후배들을 위해 골볼선수로써의 마지막 도전에 나선다.


2015년 5월. 서울에서 아시아 첫 시각장애인 경기대회가 열린다. 장애인 올림픽 티켓 3장이 걸린 중요한 대회다. 하지만 여자대표팀의 전력은 그리 좋지 못하다. 많은 장애인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체육보다는 예술이나 학문의 길을 권유한다. 여성 장애인의 경우 더더욱 그런 경향이 심해 새로운 선수 발굴이 어렵다. 생업과의 병행에 대한 어려움이나 출산·육아로 인해 선수생활 도중 포기한 선수도 많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오랫동안 직장과 집을 비울 수 없는 선수들의 사정으로 인해 이천 장애인훈련원이 아닌 고덕 사회체육센터에서 매주 주말에만 훈련을 실시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위기에 빠진 한국 여자 골볼을 위해 추순영이 13년 만에 코치 겸 선수로 돌아온다. 후배들을 돕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 “시작 휘슬이 불리는 순간부터는 오로지 경기장에 있는 세 선수가 경기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거의 다 신입이라 경험이 매우 부족해요. 그걸 보며 마음이 아팠죠. 저도 골볼을 사랑하고 선수로 뛰었던 사람인데. ‘이 친구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다가 플레잉코치를 결정하게 되었죠. 들어와서 보니 함께하는 친구들의 어머니가 다 제 또래더라고요. 저보다 더 어린분도 있고요 (웃음)”

그녀의 목표는 확고하다. 후배들을 위해, 그리고 후배들과 함께 올림픽 출전권을 따는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그렇듯이 주어진 올림픽 쿼터를 따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저 혼자 잘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기에 친구들과 함께 좋은 경기 펼치고 싶어요. 더 큰 꿈을 꾸자면 이번 대회에서 따낸 쿼터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대체선수로 갑작스레 국가대표가 되었던 16살 소녀는 어느덧 43살의 노장이자 두 아이가 엄마가 되었다. 27년이라는 동안 골볼을 통해 수많은 것을 얻었고, 수많은 도전을 했다. 이번 도전이 골볼선수로써의 마지막 도전이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에게 “언제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추순영. 그녀의 위대한 도전은 5월 10일~16일 SK핸드볼경기장에서, 17일 장충체육관에서 직접 응원할 수 있다. [헤럴드스포츠=차원석 기자 @Notimeover]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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