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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훌리건판 무간도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아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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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간도의 포스터.

정체성의 혼돈을 다룬 영화

홍콩 영화 <무간도>를 보신 적이 있나요? 이 영화는 기존의 강인한 인물들이 등장해 실력을 겨루던 홍콩 범죄영화와는 달리 주인공들의 정체성 혼란을 다룬 영화로 유명합니다.

간단히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홍콩 경찰은 마피아 조직 삼합회를 소탕하기 위해서 경찰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진영인(양조위 분)을 삼합회에 잠입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삼합회는 경찰 조직에 유능한 조직원인 유건명(유덕화 분)을 심어 놓죠.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후, 진영인과 유건명은 본래 자기 신분을 잊고 삼합회와 경찰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인재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경찰인 범죄 조직원, 그리고 사실은 범죄 조직원인 경찰. 이 두 명은 본래 자신의 신분과 자신들이 연기하는 신분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그리고 결국 서로의 존재를 눈치 챈 두 사람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최후의 대결을 펼칩니다.

2002년에 개봉한 <무간도>에 앞서 이미 1995년 잉글랜드에서 비슷한 영화가 나왔습니다. 영화 <아이디>입니다. 축구, 그 중에서도 훌리건 세계를 다룬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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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디의 포스터.

훌리건 조직에 잠입한 경찰

존(John)은 유능한 경찰입니다. 어느 날 그는 상부로부터 특별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2부 리그 축구팀인 쉐드웰(Shadwell) 훌리건들 사이에 잠입해서 철저히 비밀에 쌓인 그들의 지도자를 알아내라는 것이지요. 그는 동료 경찰 트레보(Trevor)와 함께 쉐드웰 훌리건들이 집결하는 펍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신나게 술을 퍼먹는 쉐드웰 훌리건들과 친해지지요.

존과 트레보는 이후로 쉐드웰의 경기를 따라다니며 본격적인 훌리건 생활을 합니다. 경기장 안과 밖에서 상대편 훌리건들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투척전을 펼칩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은 경찰 신분임에도 점점 훌리건의 말투와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돌아간 경찰서에서 동료 경찰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가족들에게 입에 담기 힘든 온갖 욕설을 퍼붓습니다. 게다가 비밀 임무 때문에 시작한 쉐드웰 팬 생활이건만 점점 쉐드웰의 극성팬이 되어 축구 중계를 뚫어져라 보고, FA컵 조 편성 하나에 환호를 지르는 지경에 이릅니다.

존은 더 나아가 쉐드웰 지도부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단독 행동을 벌입니다. 홀로 상대편 훌리건들 사이에 쳐들어가 그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존의 모습은 다른 쉐드웰 훌리건들에게 호감을 갖게 합니다. 반면 그 정도까지 훌리건 생활에 빠져들지 않은 트레보는 그런 존의 행동이 불만이고 걱정이죠. 얼굴에 흉터가 생기고 사사건건 동료 경찰을 향해 범죄자처럼 욕하고 소리를 지르는 존을 트레보는 말려봅니다.

하지만 존은 가족과 이혼을 하면까지 훌리건 생활에 빠져듭니다. 결국 쉐드웰의 지도부는 존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아지트로 부릅니다. 그러나 훌리건화하는 경찰들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경찰은 잠입 임무를 취소합니다. 트레보는 정상적인 경찰관으로 돌아갑니다. 이미 갈 때까지 가버린 존은 더 이상 돌아갈 가정도 없고, 오히려 경찰을 적대시하며 경찰직을 그만둡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트레보는 인종차별 구호를 외치는 일련의 스킨헤드 사이에서 머리를 박박 밀고 *‘지크 하일’을 외치는 존의 모습을 보며 한탄합니다.

훌리거니즘과 극우주의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라는 책은 영국 사회의 소소한 면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책의 첫머리에 영국인을 소개하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영국인들을 ‘예의바른 살인자의 후예들’이라고 부르더군요. 켈트, 바이킹, 앵글로-색슨, 로마인 등 호전적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민족의 피가 모두 섞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영국의 역사는 피의 역사였죠.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의 사나운 본성을 통제하기 위해 예절과 교육이 발달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민족성이 선한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이 없지만 철저한 교육을 통해 호전적인 민족에서 신사의 대명사로 태어난 영국의 강점을 배워야 한다고 이 책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본디 호전적인 영국인’의 특성을 말할 때 예로 드는 게 훌리건 난동입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잉글랜드 훌리건들은 프랑스까지 건너가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경찰이 정작 이들을 잡아들여서 신원을 조사해보니 멀쩡한 가정과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사실 일상에서의 선량함과 군중 속에서의 폭력성이라는 인간의 양면성은 비단 영국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명작 <다크 나이트(Dark Knight)>에 등장하는 악당 **하비는 이런 양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지요. 평소 법이나 도덕, 타인의 시선, 스스로의 양심과 같은 각종 제약에 억눌려 있던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은, 군중 심리나 이분법에 의한 적의 등장과 같은 특정한 상황에서 족쇄를 벗어나 큰 사고를 일으키곤 합니다. 물론 모든 인간이 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 존은 경찰과 훌리건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혼돈을 겪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훌리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존은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축구장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경찰관에게 왜 이들을 진압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존의 정체를 모르는 경찰은 이렇게 말하죠. “나한테 말하지 말고 얼른 너희 짐승 우리로 돌아가.”

왜 존은 의식 있는 문명인에서 짐승 취급을 받는 훌리건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훌리건들의 교육수준이나 주변 환경을 탓하곤 합니다. 물론 영향이 없진 않겠지요. 하지만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 반대되는 예들이 많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라는 정신병자에게 세뇌된 것처럼 행동하던 독일은 전쟁 전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였다고 하니까요.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만드는 조건에 대해 이 영화는 나름의 해답을 제시합니다. 훌리건의 엘리트 조직에 들어간 존은 결국 인종차별을 외치는 극우주의자 모임에 가세하게 됩니다. 훌리건 조직과 극우주의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은 뒤에 살펴볼 <풋볼 팩토리>에서도 나타납니다. 그 영화에서 첼시 훌리건들은 버스에 탄 인도인들을 위협하죠.

극우주의는 보통 경제적 불황처럼 사회적 불만이 극에 달한 시기에 나타납니다. 사회적 불만을 해소할 상대로 뭔가 ‘우리’와 다른 ‘너희’를 찾게 되고, 외부인이며 손쉽게 구별할 수 있는 타 인종을 그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집단 대 집단이라는 애매한 관계의 군중심리를 통해 합리적 판단을 눌러버립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잘 드러납니다. 영국의 훌리건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건 전후 경제 불황이 확산되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게다가 축구장에서는 내 팀과 남의 팀이 확연히 구분되므로 적의 설정이 쉬워집니다. 그리고 훌리건들은 늘 집단으로 행동하곤 하죠.

우리는 영화 <아이디>를 통해 축구장 폭력이 발생하고 훌리거니즘이 조직되는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구조적 문제에 대한 접근은 제도와 인간 모두에 대한 대응책을 포함합니다. 이 영화에도 나오듯 한때 경기장 안전 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잉글랜드에서 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건 힐스보로 및 헤이젤 참사로 인해 수많은 관중들이 목숨을 잃은 뒤였지요.

힐스보로 참사는 1989년에 힐스보로 스타디움에서 열린 잉글랜드 FA컵 준결승에서 96명의 관중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비록 훌리건 폭동이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훌리건 난입을 막기 위해 관중석에 친 철창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그대로 압사 당했죠. 이렇게 일반 관중의 안전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당시의 훌리거니즘은 큰 사회 문제였습니다.

힐스보로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맡은 재판장인 테일러는 이런 뼈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테일러 리포트를 작성하게 됩니다. 입석 좌석에 의자를 설치하고, 훌리건의 난입뿐 아니라 일반 관중들의 탈출로까지 봉쇄하는 철창을 철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대신 훌리건의 경기장 접근 자체를 막는 방향으로 대책이 수립됩니다. 경기장 내 음주가 금지되고, 상습적이거나 지도자격의 훌리건들의 블랙리스트가 작성되었습니다. 인터폴과의 공조를 통해 훌리건들의 출입국이 감시되었죠. 그리고 경기장 난동이 벌어질 경우 해당 구단에까지 책임을 지우는 강공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과거 무법천지였던 축구장의 치안은 많이 향상되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훌리거니즘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죠. 제도만으로는 완벽한 성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축구팬의 의식 변화와 함께 가족 위주의 관전 문화 개선이 추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우리의 축구장은 안전한 편입니다. 하지만 축구 리그의 발전과 함께 부작용도 분명 발생하겠죠. 테일러 리포트로 대표되는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여 한 발 앞서나가는 대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Sieg heil, 과거 나치당의 경례 구호.
** Harvey Dent. ‘투 페이스(two face)’로도 불립니다. 원래 배트맨의 무대인 고담시의 강직한 검사였으나 화재로 얼굴 반쪽에 심한 화상을 입고 악당이 되죠. 반쪽은 선량하고 반쪽은 흉측한 그의 얼굴은 인간 양면성을 상징합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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