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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넌 빨강이야 파랑이야?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지미그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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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로고.

맨체스터에 있는 두 개의 태양

예전에 축구의 도시인 맨체스터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지역을 양분하는 맨유와 맨시티 이야기가 나왔죠. 카메라는 어느 집에서 맨유와 맨시티 간의 맨체스터 더비(Manchester Derby)를 보는 친구들을 비춥니다. 어떤 친구는 붉은색 맨유의 옷을 입고 있고, 다른 사람은 하늘색 맨시티의 유니폼을 입고 있습니다. 맨유 팬이 선제공격을 날립니다.

“나는 우리와 맨시티가 같은 선에서 비교당하는 게 싫다. 맨유가 없었으면 세계 사람들은 맨시티라는 팀도 몰랐을 것이다.”

요즘에야 맨시티가 공격적인 투자로 유명해졌지만 인터뷰가 이루어지던 당시만 해도 맨시티는 맨유라는 거대한 팀에 밀리는 중위권 팀이었죠. 그러자 맨시티 팬이 반격합니다.

“맨유는 처음부터 맨체스터의 팀이 아니었다. 맨체스터 주변에 있던 팀이 연고 이전을 한 것이다. 맨시티만이 맨체스터를 대표하는 팀이다.”
저도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맨유가 연고 이전의 역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클럽의 초창기, 그러니까 100년도 전에 뉴턴 히스(Newton Heath LYR)의 이름으로 창단한 맨유가 발전 가능성이 높은 맨체스터에 둥지를 틀었다는 내용이 있네요. 두 팬의 대화로 유추해 보면 맨시티와 맨유의 라이벌 관계는 1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것인가 하고 경악하게 됩니다.

맨유와 맨시티의 라이벌전이 시작된 건 1881년부터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맨유가 뉴턴 히스였고, 맨시티도 웨스트 고턴(West Gorton St. Marks)이라는 팀이었죠. 당시의 두 팀 모두 철도 회사의 노동자들이 만든 실업팀 성격이 강했습니다. 두 팀의 사이가 악화된 데는 1970년대 맨유에서 활약하던 조지 베스트(George Best)가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맨시티의 수비수 글린 파도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부상을 입힌 사건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각종 우승컵을 쓸어 담으며 세계에 명성을 떨친 맨유에 비해 1부와 2부 리그를 왔다 갔다 해야 했던 맨시티는 그저 ‘시끄러운 이웃’ 취급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죠.

하지만 최근에 맨시티는 중동 거부의 공격적인 투자로 분위기를 일신했습니다. 최근에는 맨유보다도 더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으니 그동안 억눌려 왔던 맨시티 팬들의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래서 이번 회에는 맨유와 맨시티 간의 라이벌 의식을 다룬 영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미 그림블>입니다.

왕따 맨시티 팬, 행운의 축구화를 만나다

지미 그림블(이하 지미)은 맨체스터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소년입니다.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싸움도 잘 못하고 소심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지미 주변의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맨유의 팬입니다. 그리고 지미는 얼마 안 되는 맨시티의 팬이지요. 특히 학교 축구팀의 주전 선수인 고든(Gordon Burley)과 사이코(Psycho)는 열혈 맨유 팬으로 앞장서서 지미를 괴롭힙니다. 맨시티 로고가 새겨진 지미의 가방을 빼앗아 그 위에 오줌을 갈기는가 하면, 등하교길마다 집단 린치를 가하기도 합니다.

지미는 왕따 신세에서 벗어나고자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고든 일당의 본거지인 축구부에 들어갑니다. 그 곳에는 고든과 사이코는 물론이고, 불량스러운 팀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코치는 지친 느낌의 에릭(Eric Wirral). 그들은 맨체스터 지역 고등학교 축구팀들의 토너먼트인 맨체스터 스쿨컵(Manchester School Cup)에 출전합니다. 같은 팀원이 되면 고든 일당의 폭행이 조금은 나아질 거라 생각한 지미. 하지만 지미에 대한 집단 괴롭힘은 더욱 심해집니다. 경기에 나설 때마다 맨유의 응원가를 부르는 고든 일당에게 맨시티 팬인 지미는 눈엣가시이죠.

사실 지미가 맨시티 팬이 된 것은 해리스라는 남자의 공이 큽니다. 사생아인 지미는 젊은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죠. 지미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된 해리스는 지미를 친아들처럼 챙겨줍니다. 그리고 같이 맨시티 경기장에 가죠. 하지만 알고 보니 해리스는 다른 여자와 결혼한 유부남이었습니다. 해리스와 함께 잠깐 찾아온 행복도 갑자기 사라집니다.

어느 날, 지미는 고든 일당에게 쫓기던 중 폐가로 숨어듭니다. 그리고 웬 노숙자 아주머니를 만나죠. 노숙자 아주머니는 지미에게 행운을 주는 축구화라며 낡은 축구화를 줍니다. 1960~70년대에나 쓰였을 법한 갈색 가죽의 구식 축구화죠. 아주머니는 맨시티의 전설적인 선수 로비 브루어(Robbie Brewer)가 신던 축구화라고 말합니다.

지미는 행운의 축구화라는 말에 처음에는 콧방귀를 낍니다. 하지만 고든 일당이 지미의 축구화를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낡은 행운의 축구화를 신게 되죠. 그리고 놀랍게도 역전골을 넣게 됩니다. 이후에도 지미는 행운의 축구화를 신고 맨체스터 스쿨컵에서 승승장구합니다. 상대가 그라운드에서 축구보다 패싸움을 더 좋아하는 불량배 학교든, 넓은 잔디밭과 성채 같은 건물을 자랑하는 고급 사립학교든 간에 지미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지미의 코치인 에릭이 맨시티의 전설적인 선수라는 사실도 밝혀지죠.

마침내 결승까지 진출한 지미네 학교 축구팀. 하지만 위기가 닥칩니다. 지미를 시기한 고든은 지미의 행운의 축구화마저 버립니다.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한 지미. 결승전은 지미가 좋아하는 맨시티의 홈구장에서 열리게 됩니다. 과연 지미는 자신감을 찾을 수 있을까요? 자신을 괴롭히는 맨유 팬 친구들의 콧대를 눌러버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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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미 그림블의 포스터.


너는 시티냐 유나이티드냐? 블루냐 레드냐?

영화를 보면서 부러웠던 것은 맨체스터 사람들의 삶에 뿌리 깊게 녹아 있는 축구에 대한 사랑입니다.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노숙자 아주머니조차도 지미가 축구팬이라고 하자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시티냐 유나이티드냐?” 그뿐이 아닙니다. 축구보다 권투를 좋아한다는 학교의 여학생도 지미가 맨시티의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자 이렇게 말하죠. “넌 블루구나?”

반면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물론 K리그에 대한 인식 자체는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축구팬임을 밝히면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너 축구 좋아한다고? 어제 맨유와 리버풀 경기 봤어?” 이 이야기를 영화 <지미 그림블>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이 변하겠죠. 맨체스터 시민인 지미에게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너 축구팬이라고? 그럼 밀란이나 마드리드의 팬이니?” 어떻습니까? 조금 이상하죠?

맨체스터 사람들은 맨유나 맨시티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팀이기에 응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보듯 그저 자기 고향 팀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인연이 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고 응원합니다. 누군가가 축구팬이라면 당연히 자기 지역 팀을 응원할 것이고, 맨체스터를 연고로 하는 팀은 맨유와 맨시티이기 때문에 두 팀 중 어느 팀을 좋아하냐고 자연스럽게 묻는 것입니다. 맨유나 맨시티가 지금처럼 유명한 팀이 아니라 2~3부 리그를 왔다 갔다 하는 팀이었다 해도 지미는 여전히 맨시티를 응원할 테고, 지미를 괴롭히는 고든 일당은 맨유를 응원하겠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K리그보다 해외축구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우리의 분위기는 아쉽습니다. 해외파의 활약도 물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축구사랑은 기본적으로 지역 연고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맨유에 대한 시티 팬의 피해 의식?

재미있는 점은 또 있습니다. 이 영화는 맨시티 팬이 주인공입니다. 단지 맨시티의 팬이고 블루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얻어터지는 신세죠. 그런 그가 어느 날 마법의 신발을 신게 되자 뛰어난 축구선수로 변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던 맨유 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죠.

게다가 지미네 고등학교 팀의 유니폼 역시 하늘색입니다. 코치는 예전 맨시티의 레전드. 그들은 결승전에서 다분히 맨유를 연상시키는 붉은 옷의 상대를 꺾습니다. 맨유 스카우트가 지미에게 입단 제의를 하자 지미는 미소를 지으며 거절합니다. “맨유보다 더 좋은 팀이 있단 말이냐?”라고 맨유의 스카우트가 질문하자 지미는 “맨시티요”라고 답하죠.

이런 장면을 보다 보면 화려한 맨유의 역사에 가려진 맨시티의 팬들이 불만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들의 불평등한 관계를 역전시켜줄 ‘마법의 신발’을 간절히 찾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그리고 맨시티 팬들은 마치 기적처럼 ‘마법의 신발’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랍의 거부인 셰이크 만수르의 자본력에 힘입어 거침없는 투자가 이어졌죠. 맨시티 홈구장과 도시 중심부를 잇는 경전철이 건설되고 맨시티 전용 방송국까지 생겼다니 오일 머니의 힘이 새삼 느껴집니다. 그 결실이 앞서 언급했던 최근의 성적임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맨유의 팬들은 최근 맨시티의 기량이 상승한 것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맨시티가 진정한 명문팀인가에 끊임없이 의문의 시선을 던지고 있습니다. “돈으로 클래스를 살 수는 없다”는 말을 하면서요. 어마어마한 자금력을 자랑하는 맨시티에 대한 맨유의 질투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지미가 마법의 신발을 빼앗긴 후 스스로의 능력으로 우승을 일군 것은 상징적입니다. ‘오일 머니’라는 마법의 신발이 사라져도 과연 맨시티는 꾸준히 우승하는 저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현대 프로 스포츠가 아무리 돈에 좌우된다고 해도 명문팀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덧붙여: 이 영화는 축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볼거리가 많습니다. <트레인스포팅>처럼 영국 뒷골목의 갱스터 세계를 표현한 블랙 코미디라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게다가 중요 장면마다 감미로운 브릿 팝과 록 음악이 흐르죠. 굳이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영국 영화와 문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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