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리버풀에는 180쪽짜리 축구파일이 있다
이미지중앙

리버풀의 브랜드 로저스 감독. 왜 영국 축구팬들은 이 감독을 주목하고 있을까? 사진=리버풀 홈페이지

[헤럴드스포츠(런던)=이재인 통신원] 리버풀의 브랜든 로저스 감독은 20살이 되던 해 레딩(설기현이 뛴 팀)에 입단하지만 불운하게도 한 시즌 만에 부상으로 은퇴를 해야만 했다. 축구가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로저스는 선수생활을 접으면서 “향후 최고의 감독이 되겠다”고 다부진 결심을 했다.

축구감독을 향한 천로역정
로저스는 스페인에서 감독수업을 받았다. 특히 FC바르셀로나의 점유율축구에 매료돼 펩 가디올라와 토털사커를 완성시킨 요한 크루이프를 직접 찾아가 그들의 축구철학을 직접 듣고 배웠다. 바르셀로나뿐만 아니라 FC발렌시아, FC세비야를 방문했고, 네덜란드로 넘어가 튼실한 유소년 시스템을 자랑하는 아약스의 감독과 코치진으로부터 한수 배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만의 축구철학에 기초를 다졌다.

이후 로저스는 레딩과 첼시에서 유소년아카데미와 리저브팀을 이끌었는데 조세 무리뉴 첼시 감독의 눈에 들었다. 무리뉴 감독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로저스가 미래에 엄청난 감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무리뉴 감독의 축구를 몸소 배운 로저스도 인터뷰에서 “무리뉴 밑에서 배우는 것은 마치 하버드대학에서 배우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8년 FC왓포드(Watford)에서 첫 감독이 된 로저스는 이후 레딩, 스완지시티를 거쳐 2012년 리버풀 사령탑에 올랐다. 이때, 그러니까 로저스 감독과 존 헨리 리버풀 구단주가 면접을 할 때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이미지중앙

로저스 감독이 다시 살려놓은 '여기가 인필드이다' 사인보드. 사진=리버풀 홈페이지

180쪽 짜리 축구파일

로저스 감독은 헨리 앞에 180쪽짜리 파일을 내놓았다. 자신이 15년 동안 축적해온 180쪽짜리 비밀 축구파일을 꺼내놓았다. 이 파일은 축구철학뿐만 아니라 로저스 감독이 선호하는 작전과 선수성격, 훈련방법, 유소년 발굴과 육성프로그램 등이 담겨 있었고 헨리 구단주는 이 파일을 보고 그의 축구철학과 섬세함, 뚜렷한 목표의식에 완전히 매료됐다.

실제로 헨리 구단주는 그후 로저스의 섬세함에 입이 쫙 벌어졌다. 로저스 감독은 홈구장인 안필드의 골네트를 원래의 색깔인 빨간색으로 바꿨고, 1974년부터 1998년까지 25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릴 때 걸려 있던 ‘여기가 안필드이다 (This is Anfield)’ 사인보드도 원상복구했다. 여기에 리버풀의 공식응원가(You’ll Never Walk Alone)도 양팀 선수들이 경기장에 입장할 때부터 틀기로 해 선수들의 사기를 높였다.

그의 섬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패스가 더 빨리 이뤄지고, 역습축구가 더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안필드 경기장의 잔디는 물론 훈련장 멜우드의 잔디까지 다 새로 깔았다.

훈련도 독특했다. 로저스 감독의 파일을 바탕으로 1주일에 4일만 실시했다. 그리고 이 훈련은 워낙 세심해 리버풀 선수들은 이 훈련 때마다 놀랐다. 이 섬세함은 선수들을 일일이 다루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리버풀의 전설이자 주장인 스티븐 제라드는 로저스 감독이 개성이 강한 선수들을 모두 다른 방법으로 다루는 것을 보고, "일대일 선수관리는 최고"라고 극찬했다. 제라드에 따르면 로저스 감독은 선수들 스스로 가치있게 느끼도록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래서일까, 리버풀 팬들은 이번 시즌에 영입한 ‘악동’ 마리오 발로텔리의 성공을 점치고 있다. 선수다루기에 능한 로저스 감독이 있기 때문이다.

바뀌지 않는 최고는 없다
더 대단한 사실은 로저스 감독은 현대축구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축구스타일을 변형시킨다는 점이다. 스완지 시절, 그리고 리버풀 첫해 로저스 감독은 점유율축구를 구사했다. 이 시절 그는 인터뷰에서 “바르셀로나와 같이 경기당 점유율을 지배하면(65~70% 이상) 그 경기를 이길 확률이 79%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 철학으로 로저스 감독이 이끈 스완지는 2011/12 시즌에, 리버풀은 2012/13 시즌에 EPL에서 모두 점유율 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작년 시즌 리버플의 점유율은 9위로 처졌다. 그의 철학이 변한 것일까?

로저스 감독이 현실과 타협을 한 것이 확실하다. 점유율축구를 구사한 리버풀은 많은 경기에서 그저 공을 소유할 뿐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지 못했고 수비진에서 짧은 패스를 이용한 빌드업을 진행할 때 상대팀이 강한 피지컬을 이용한 전방압박을 가하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곤했다. 작년 시즌 사우샘프턴 (Southampton FC)의 압박에 무너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로저스 감독은 작년부터 서서히 리버풀의 축구스타일을 변형시켰다. 바르셀로나처럼 점유율을 위한 압박이 아닌 ‘압박을 위한 압박’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팀에게 5초룰을 적용시켰다. 즉 공을 잃을 시 바로 5초 동안 압박을 가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리버풀은 단숨에 빠른 패스를 바탕으로 역습과 속공을 구사하는 팀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현재까지는 대성공이다. 공을 되찾았을 때 침착하게 빌드업 플레이를 펼친 옛날과 달리 빠른 템포와 역습으로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전술은 2013/2014 시즌에 맨체스터시티를 4-3, 아스날을 5-1, 토트넘을 4-0, 에버튼을 4-0으로 격파하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 같은 전술 때문에 리버풀은 현재 프리미어리그에서 경기당 슈팅 횟수가 가장 많고, 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팀이 됐다.

이미지중앙

첼시시절 무리뉴 감독(왼쪽)과 로저스. 로저스의 청출어람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국판 로저스는?
물론 로저스 감독이 패스플레이와 점유율축구를 아예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180쪽의 파일을 준비했을 때부터 세 가지 목표를 두었다. 첫째,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것, 둘째, 매력적이고 공격적인 축구를 펼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소년 선수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이다.

이 3가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로저스 감독은 마치 선수 각자에게 각기 다른 스타일로 대하는 것처럼 축구도 경기마다 점유율축구, 압박과 속공 등 다양한 전술을 사용한다.

이런 로저스 감독이 오랜 스승 조세 무리뉴의 수비축구까지 선보일 수 있을까? 로저스 감독은 무리뉴 밑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수비축구는 선보일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작년 시즌에 첼시와 맡붙은 후 무리뉴의 수비축구를 비판한 적이 있다. "시간을 끄는 첼시는 골대 앞에 마치 버스 두 대를 세워둔 것 같았다"고 비꼬았다. 이러한 철학 때문에 리버풀은 작년 시즌 막판에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서 3-0으로 앞서다가 마지막 11분에 3골을 허용했다.

간혹 골문을 걸어잠그는 수비축구도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로저스 감독의 신념은 확실해 보인다. 이번 시즌에 그의 신념만으로 조시 무리뉴의 첼시를 제치고 리그우승을 할 수 있을까? 축구팬들이 리버풀을 주시하는 이유 중 하나다.

로저스의 180쪽짜리 축구파일을 보고 싶다. 아니, 한국이 영국으로부터 수입할 것은 값비싼 명품이 아닌 리버풀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이 축구파일일지도 모른다.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