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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폭력 쇼크] ④사건 이후, 절대 지나쳐선 안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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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한공주' 스틸컷)



불길이 거세다. “#미투” “#With You” 성폭력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목소리와 이들을 응원하겠다는 지지가 대한민국을 휘감았다. 지난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성폭력 폭로와 자성의 불길은 대한민국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있는 폭로, 최영미 시인의 적나라한 시 뿐만 아니다. 정 ·재계는 물론이고 방송계, 예술계 너나할 것 없이 더 이상 성폭력을 참지 않겠다는 이들의 결단력 있는 행보가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이 본질적 문제 해결로 이어지겠느냐에 대해선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많다. 반짝 현상에 그치지 않고 해결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성폭력 앞에 왜 많은 이들이 묵인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는지, 어느 한 집단과 권력에 초점이 맞춰진 이슈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함께 짚어봤다.-편집자주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문다영 기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성폭력 피해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분명 좋은 징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려도 나온다. 성폭력 가해자가 누구인지, 피해자가 어떤 행위를 당한 것인지에만 시선이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 성폭력 이후의 삶은 어떤지까지 생각지 않는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관심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사건의 전말만이 아닌, 성폭력 관련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과 일상마저도 주시한다면 성폭력 범죄 해결 의지는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 가운데 성폭력 피해자들의 실상을 일일이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의 아픔과 바뀌어버린 삶을 조명한 작품들이 대중에게 남다른 의미를 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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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한공주' '스포트라이트'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포스터)



■ 사건 후, 언론의 자세, 억울한 누명

국내영화 ‘한공주’(2013)는 2004년 경남 밀양에서 발생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했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모든 것을 잃고 쫓기듯 전학을 가게 된 공주가 아픔을 이겨내고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이야기를 그렸다. 자극적이지 않게 조용히 공주의 뒤를 따르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잘못한 것이 없는 한 아이를 어둠속으로 내모는 어른들의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스크린을 똑바로 응시하기가 힘들어질 정도다. 한 영화기자는 이 영화에 대해 “성폭행 그 자체가 아니라 당한 후 피해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다룬 점이 인상 깊다”고 밝혔다.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는 보스턴 성직자들의 성학대와 로 추기경의 은폐 사실을 탐사보도한 지역일간 보스턴글로브 ‘스포트라이트’ 팀의 실화를 담은 작품이다. 2016년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보스턴 글로브’에 새로운 편집장 마티(리브 슈라이버 분)이 부임해오며 스포트라이트 팀에게 아동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가톨릭 사제에 관한 주제로 기사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건의 중심으로 다가갈 수록 가톨릭 사회가 전적으로 이 문제를 은폐하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언론인들은 이 사건을 최대한 공정하고 올바르게, 그러면서도 가톨릭 사회가 저질렀던 범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려 한다. 성폭력 사건의 표면만 들여다보기에 급급한 언론사 행태에 올바른 언론의 자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가 깊다.

일본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6)는 앞선 두 작품과 결이 조금 다르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출근 시간대 지하철에서 치한으로 오인받은 한 젊은 남자가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국가의 사법제도와 맞서 싸우는 법정영화다. ‘쉘 위 댄스’로 유명한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첫 사회극이기도 한 이 영화는 불합리한 일본의 사법제도에 맞섰던 한 남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가 지적하는 것은 용의자의 인권 문제와 거대하지만 허술한 사법 시스템이다. 성폭력 범죄에 있어 국내 법 시스템도 가해자와 피해자에 모두 불리한 지점들이 있기에 눈여겨 볼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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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BS '마녀의 법정')



■ 현실을 파고드는 이야기

드라마 ‘마녀의 법정’(KBS2, 2017)을 빼놓을 수 없다. ‘마녀의 법정’은 성폭력의 문제를 지위와 권력, 힘의 논리로 바라봤다. 성고문, 갑이 을에게 지위를 이용해 저지르는 성추행과 성폭행, 몰래카메라, 그리고 의붓 아버지의 딸 성폭행과 중학생 칼부림 사건까지 민감한 소재들을 다루며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특히 여교수의 조교 성폭행 사건, 의붓아버지의 딸 성폭행 사건. 모두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육체적 힘의 논리로 피해자를 억누르려고 한 것에서 비롯된 사건들로 현실을 파고들었다. 지난 연말 방송사 시상식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정려원의 “현재 성폭력피해자 분들 중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다.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분들에게 이 드라마가 위로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촬영했다”는 수상소감도 의미가 남다르다.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살아온 우리가 사실은 같은 상처를 가지고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MBC 베스트극장 ‘상처’ 중 주인공 나연(옥지영)의 내레이션이다. 이 작품은 성폭행 피해 후유증을 안고 사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사랑과 연애에 있어 정반대의 갈등을 겪는 자매가 실은 각각 유년시절 겪은 성추행과 그것을 목격한 힘든 기억 탓에 성인이 된 후까지 심리적 상처로 고통받았음을 깨닫는 과정을 담고 있다. 언니 나영은 어릴적 새아버지에게 성추행 당한 기억을 갖고 전화 상담원으로 다른 이들의 상처를 위로하며 용기를 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깊은 아픔은 타인과 공유하지 못해 힘들어한다. 이 작품은 그간 가려져 온 아동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현실감 있게 풀어내 호평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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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악어 프로젝트' '용서의 나라' 책표지)



■ 피해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다

‘악어 프로젝트’(토마 마티외 | 푸른지식)은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풀어낸 그래픽 북이다. 양성 평등 사회로 알려진 프랑스에서 논란이 될 만큼 성폭력이 발생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이 책은 공공장소 성추행, 직장 성희롱, 데이트 폭력 등 다양한 성폭력 상황을 50여개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남성을 모두 악어로 그렸다는 점이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그 여성을 대상화하는 포식자인 남성. 즉 ‘악어’들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단순히 에피소드만을 풀어내기보다 성폭력과 성차별 피해자가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부터 신체 방어 기술, 성폭력 신고 전화번호, 피해자를 보았을 때 목격자가 할 수 있는 일까지 상세한 방법들을 알려준다.

‘용서의 나라’(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 | 책세상)는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1996년 겨울, 열여섯 소녀가 교환학생 자격으로 아이슬란드에 유학 온 열여덟 살 호주 소년에게 강간당하고 버림받는다. 사건 후 9년 동안 섭식 장애, 알코올 의존, 자해 등 삶의 벼랑에서 몸부림치던 여자는 마지막 절규인 양 고국으로 돌아간 가해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놀랍게도 절절한 후회와 진솔한 참회로 가득한 답장이 도착한다. 여자와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해 이후 8년간 300통의 서신을 주고받는다. 그렇게 상호 이해에 도달한 그들은 지난 삶을 욱죄어온 사건의 매듭을 풀고, 어둡고 아픈 시간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직접 대면하기로 결심한다. 2013년 봄 만난 이들은 그로부터 3년 뒤 함께 샌프란시스코 테드 강연장에 서기도 했다. 진실로 참회하는 가해자, 가해자로 인해 망가진 삶을 산 피해자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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