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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다영의 읽다가] 자부심과 자기기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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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문다영 기자] 직장인에겐 3, 6, 9의 법칙이 있다고들 말한다. 3개월차, 6개월차, 9개월차에 ‘격렬하게’ 퇴사하고 싶은 욕구가 밀어닥친다는 것이다. 비교적 신입사원들의 고비 주기로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격렬하게, 미치도록 이 일을 그만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한 시점은 첫 번째 회사가 아니었다. 고민의 이유도 일이 아닌 사람 때문이었다. 직장인들이야 일보다 사람이 더 힘들다는 걸 뼈저리게 이해하겠지만 내 경우는 조금 더 심했다. 상사 중 한 명이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꼬꼬마 신입과 오랜 세월 이 직종에 종사한 선배. 실력과 노하우 차이를 논하는 것조차 말이 안되는 건 당연했다. 또 나는 이미 인터넷 시대에 진입한 세대였고 그 선배는 여전히 종이신문과 이전의 영광에 취해 사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취재 방식이 남달랐다. 대학생활 내로라하는 신문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배운 방식과 너무도 달랐다. 사생활을 파헤치는 정도가 심했다.

어느 정도인고 하면 한 스타의 가정사가 터졌을 때 그의 측근이라 거짓말을 하고 선배와 함께 그의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요즘이야 절대 통하지 않을 방식일텐데 그땐 통했다. 주차장이 지상뿐인 지방 방송국이었으니 그를 기다리려면 밖에서 기다려도 충분했지만 선배는 굳이 대기실까지 ‘침입’했다. 두어 시간을 기다린 후 그 연예인이 “○○가 왔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하며 들어섰다. 그리고 선배가 신분을 밝혔을 때 그가 지은 표정과 눈빛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심경을 듣고자 했던 선배 방식대로의 취재였지만 당연히 허탕일 수밖에 없었다. 밤을 새고 돌아오는 그 새벽 버스 안에서 나는 울었다. ‘이런 식으로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려고 기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 자괴감이 내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선배는 변할 리 없었다. 자신이 지금껏 해 온 그런 식의 취재가 최고인 양 읊어대기를 좋아했다. 그 취재를 통해 얻은 단독과 특종이 그에겐 훈장이었고, ‘변해야 한다’거나 ‘도를 넘어섰다’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일간지와 성격이 다른 매체였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갔지만 이미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개인 정보 보호가 강화됐고 사생활 침해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다. 시대가 변하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도덕적으로라도 바꿔야 할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결국 방법은 없었다. 그 선배와 나는 함께 일하는 내내 평행선을 달렸지만 그 선배는 내가 회사를 나오는 끝날까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최선이었고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자부심에 취해 살았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우편으로라도 보내주고 싶은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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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남아있는 나날' 책표지)


2017년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라는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이 책에도 자신이 걸어온 길이 최선이었다 생각하는 이가 등장한다. 영국 명문가 집사로서 평생을 산 스티븐스는 자신이 평생 충직하고 위대한 직업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이와는 다르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산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앞선 선배처럼 자만에 취해 살아온 이는 아니기에 그 알을 깨고 나오려 한다는 점은 다르다.

1956년 여름, 영국의 저명한 저택 ‘달링턴 홀’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는 새로운 주인의 호의 덕에 6일간의 휴가를 받고 생애 첫 여행길에 나선다. 여행의 목적은 켄턴 양을 찾아가는 것. 젊은 날 사랑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녀가 보내온 편지를 곱씹어 읽으며 길을 나선다. 스티븐스는 가족과 사랑마저 포기한 인물이다. 오직 맹목에 가까운 충직함으로 달링턴 경을 섬기고 달링턴 홀을 지켜온 과거를 끝없이 회상한다. 그러나 그가 존경했던 주인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진실이 밝혀지자 꼿꼿이 지켜온 ‘위대한 집사’로서의 신념과 신뢰가 무너져내린다. 스티븐스는 인생의 황혼기가 되어서야 지나가버린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되돌아보게 된다.

‘남아있는 나날’은 어렵게 흘러간다. 스티븐스는 지속적으로 집사의 의무와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에 집착하며 설명하고 또 설명하려 애쓴다. 이 대목들이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평이하게, 다소 지루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작가의 모든 문장은 스티븐스가 집사로 살아온 인생과 남아있는 날을 위한 것이다. 왜 이런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는가에 대한 의문은 한 장 한 장 스티븐스의 인생을 되짚으면서 풀려나간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 측은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이시구로는 초기작에서 이미 가장 깊이 다루는 주제 ‘기억, 시간, 자기 기만’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글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조심스럽고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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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남아있는 나날' 스틸컷)


조심스럽고 절제됐기에 빠른 전개와 속도감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지루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길고 긴 스티븐스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 독자에게 묵직한 상념을 남긴다. 내가 걸어온 길은 어떤 길이었는가.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를 나의 남아 있는 나날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의 삶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스티븐스가 가족과 사랑까지 외면해가며 지키려 했던 집사로서의 자부심이 주인의 행적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듯 우리는 생의 순간순간 ‘맞다’ ‘옳다’고 생각해왔던 지점들이 무너지는 좌절을 마주해야 한다.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책 8종 중 5종을 번역한 김남주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더듬이로 길을 가고 그 여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스티븐스가 여행을 통해 더듬이를 세웠듯 우리 역시 끝없이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찰하며 더듬이를 세워야 할 것이다. 누구나 스티븐스와 다르지 않다. 그가 시대적 상황 속에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억압돼 살았듯 우리 역시 사회와 정해진 틀 안에서 지각력이 억압된 채 삶의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남아있는 나날’은 독자들이 삶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하게 해준다. 2017이란 숫자를 살아내고 2018과 마주해야 하는 시점에 읽어볼 가치가 있다.

302쪽의 책은 생각보다 가볍다. 그러나 그 안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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